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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Home 방송내용 출가 노트 사진 속 출가
  • “출가” 를 촬영하며 만난사람들 그리고 나 ...

  • (내레이션 없는 휴먼 다큐멘터리 - 윤영관 PD)



    양산 통도사에서 영축산 자락을 따라 30분쯤 올라가다 보면 극락 암이 나온다. 극락 암에는 당대의 선지식 경봉 스님이 기거했던 삼소굴이 있다. 경봉 스님이 열반에 드신 지 이 십 년이 넘었지만 경봉 스님의 상좌승이었던 명정은 여전히 그 곳에 있다.
    1987년 부처님 오신 날 특집 ‘사리의 신비’를 제작하던 때 이야기다. 삼소굴에서 경봉의 유품들을 촬영하고 상좌승을 지낸 명정 스님과 인터뷰에 들어갔다. 명정은 경봉 스님 살아 생전에 ‘스님 세상 뜨시고 나서 뵙고 싶으면 어찌합니까?’ ‘야반 삼경에 대문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이런 선문답으로 유명하다.
    경봉 스님의 일화, 유언, 남기신 교훈, 생애 등을 묻고 얼추 인터뷰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 나는 괜한 심술 보를 작동시켰다.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진 것이다. ‘그런데 스님, 지금 경봉 큰스님은 어디 계실까요?’
    죽은 경봉이 어디 있냐는 질문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극히 짧은 침묵을 끝낸 명정이 대답했다. ‘손 좀 주세요.’ ‘네?’ 얼떨결에 손을 내민 나에게 명정은 손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경봉이 어디 있냐는 질문은 사실 교만함이고 상대방을 떠보고자 함이었다. 인터뷰를 멋지게 마무리하기 위한 PD의 오만함이었다.
    그 무엇도 대답이 될 수 없는, 그러면서도 그 무엇도 대답이 되는 나의 우문에 명정은 명쾌한 답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은 그 질문 자체를 고스란히 돌려보낸 손바닥 가르침이었다.

    17년이 흘렀다. 33살 청춘이 오십이 됐다.
    명정의 손바닥 가르침이 그리워질 무렵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다.
    월정사 단기 출가학교. 그곳에서는 조계종 사상 최초의 출가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 과정이 준비 중이었다. 남녀 60명을 선발하여 한 달 간 교육을 통해 출가를 경험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8월 중순, 그곳의 관계자 스님들과 여러 차례의 회의를 갖은 후 ‘출가’ 제작에 들어갔다. 제작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3대 1의 경쟁을 뚫은 제 1기 출가학교 60명 합격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MBC입니다. 출가학교 30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세 가지를 여쭤보겠습니다. 첫 째, 혹시 주인공이 되실 수 있는지요. 둘째, 주인공은 싫지만 찍는 것은 상관없는지요. 셋 째, 찍히는 것 자체를 꺼려하시는지요.’
    ‘주인공이 될 수 있다’가 열 명 남짓 나왔다. 목포, 부산, 대구, 서울, 일산 등 주인공 후보를 만나러 곳곳을 다닌 결과 주인공은 다섯 명으로 압축되었다.


    송광섭 회장은 최고령자다. 70세. 벽산엔지니어링, 한아 엔지니어링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해군 장교출신으로 항만 기술자다. 큰딸은 코넬대 출신으로 연세대 교수고 두 아들 역시 하버드와 컬럼비아 대에서 MBA를 했다.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출가를 결심했다.
    36세의 이민우. 노총각인 그는 제법 알려진 광고 카피라이터다. 출가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고자 월정사를 택했다.
    23살 여대생 윤 지은. 교육학 전공인 그녀 역시 출가를 진지하게 고민중이다. 속세도 좋지만 산사 생활 역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택하려 한다.
    신현임. 48세로 11년 전 홀로 되어 두 딸을 대학생으로 키워 냈다. 컴퓨터 200여대를 직접 조립해 봤으며 컴퓨터 학원 강사 생활을 했다.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새로 태어나고자 함이 오대산에 가는 이유였다.
    이들의 생활은 2004년 9월 13일부터 시작되었다. 8명의 스님들이 면접 시험을 보는 갈마가 첫 번째 관문이었다. 갈마는 산중의 고유한 의결 방식으로 전원 만장일치가 되어야 통과가 되는 시험이었다. 갈마에는 합격자 중 8명의 결시 자를 뺀 52명이 응시했다. 52명중엔 5명의 주인공 외에도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갈마 당일에 입학을 지원한 14살 문경원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합류했다. 대구 오성중학교 1학년인 녀석은 학교를 휴학한 후 부처님 뜻을 공부하러 왔다고 스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갈마가 끝나고서야 입학식이 거행되고 입학식에는 청규 발표가 있었다. 청규는 청정한 규율로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지표였다.
    잡담하지 않으며(묵언), 담배 피우지 않고, 일체의 간식을 금하고,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입학식이 끝나자 지갑, 책, 휴대폰, 카메라, 노트북 등 소지품이 압수되었다.

    둘째 날은 참으로 바쁘게 전개되었다.
    새벽 3시 30분 기상, 새벽 예불, 삭발식, 일주문에서 적광전까지의 삼보일배, 수계식, 발우 전달식, 적멸보궁 참배 등이 연이어 계속되었다.
    단기 출가학교 학생들은 행자라고 불리어졌고, 그들은 모두 탈진해 갔다. 그렇게 시작한 출가학교는 보름째 되는 날 추석이 끼어 있었고 추석이 또 한번의 고비였다. 3명의 탈락자가 추석날 삼천 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출가학교의 마지막 고갯길은 졸업 전 이틀 간. 이틀 밤을 꼬박 새고 철야 삼천 배와 철야 용맹정진을 이겨내야 졸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981년에 입사하여 1982년 ‘역사의 고향’이라는 다큐멘터리에 투입되어 지금껏 연출을 해 오면서 꿈꾸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다. 내레이션이 없는 다큐멘터리. 가슴으로, 느낌으로 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자 함이 오랜 소원이었다. 이번 ‘출가’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출가‘는 자막, 현장 음, 인터뷰 만으로 구성하였고, 노래 3곡을 작사작곡 하여 영상 편집한 새로운 다큐멘터리다.
    촬영은 2004년 9월초부터 시작되었다. 출가 5일전 무렵을 찍어 나갔다. 서울 일산 대구 부산 촬영을 끝내고 손님맞이 준비에 바쁜 월정사로 향했다. 내레이션이 없는 다큐 촬영인지라 우선 현장 오디오 픽업에 가장 신경을 썼다. 내레이션을 대신할 인터뷰도 다양하게 진행해 나갔다. HD 촬영을 맡은 카메라맨 이영관은 참으로 영상 감각이 뛰어난 젊은 친구였다. 산사 촬영에 더없이 잘 맞아떨어진 장점을 지닌 카메라감독을 만난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롱 테이크 기법과, 앙각 촬영, HD 카메라특유의 16:9사이즈에 맞는 영상처리, 긴 호흡이 출가촬영의 기본이 되었다. 녹음은 와이어리스 마이크와 건 마이크를 이용했으나 오디오 픽업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넓은 실내 공간에서의 스피커 소리를 픽업 했을 경우 방송용으로 적합하지 않았고, 편집 시 가장 애를 먹은 부분이 역시 오디오 편집이었다. 내레이션 없는 다큐멘터리 제작은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시스템으로 촬영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의당 동시녹음 팀과 작업을 했어야 했구나 하는 후회가 편집 시 무척 들었다.
    내레이션 없는 다큐-“출가‘의 제작 포인트는 음악이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 음악은 맛을 내는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내레이션이 없는 다큐제작에서 음악은 양념의 역할뿐만 아니라 메시지 전달의 메인 요리로 등장해야 했다.
    해설대신 음악이 상당부분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출가“ 촬영을 월정사에서 한 달간 하게 되면서 틈틈이 제작일지를 쓰고 주제곡 작사를 해 나갔다. ”출가-집을 떠나며“,”첫 마음으로“,”고행-마음을 찾아서“ 이렇게 3곡의 작사는 방송 나가기 한 달 전에 완성되었다.
    이 곡들은 음악감독 한 문휘에게 보내졌고, 한 감독은 틈틈이 촬영원본과 편집 본을 보기 위해 편집실을 들락거렸다. 내레이션이 없는 휴먼다큐 제작은 흐름이 있는 이야기 전개 구성으로 이루어 졌고, 현장 오디오와 인터뷰의 적절한 배분과 함께 음악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직접 작사한 주제가 3곡은 브릿지 역할 뿐 아니라 한 단락을 마무리하는 중간 정리의 시간으로 활용되었다. 세 곡의 주제가를 유효 적절 중간 중간 삽입하다보니 시청자들의 평은 “출가”에 빨리 몰입되었고, 시청시간이 빨리 지나 갔다는 것이다. 감정이입과 프로그램으로의 몰입이 잘되었다는 평들이 무척 많았다.

    졸업식 날 모든 사람이 짐을 챙겨 일주문을 나섰다. 출가를 결심한 대학생 윤지은도, 출가를 포기한 카피라이터 이민우도 집으로 향했다. 70세의 송광섭 회장은 부인과 세 자녀와, 14살 문경원은 엄마와 함께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어 나갔다. 그런데 마흔 여덟 신현임 씨는 월정사에 남았다. 자신들이 입었던 행자 복을 세탁하고 다리미질하는 자원 봉사자로 남은 것이다. 3일간의 자원 봉사였다.
    누군들 기나긴 한 달간의 고행을 끝내고 나면 자유에 목말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3일을 유보시켰다. 한 달 간 월정사에서 얻은 것이 너무도 많아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뜻이었다.

    “현지니? 엄마야. 엄마 오늘 끝났거든. 그런데 오늘 못 가. 삼 일 있다가 금요일에 갈게.”
    “ 엄마 오늘 생일이잖아, 미역국은 먹었어?”
    그녀는 자신의 마흔 여덟 번째 생일을 월정사에서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