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방송 : 1999.9.12~ 일요일 밤 11시 30분
2005(3/20 첫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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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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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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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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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2000~1999
 
 
 2005.3.20.  87회.「육영수와 문세광 Ⅰ」- 조준묵
 2005.3.27.  88회.「육영수와 문세광 Ⅱ」- 조준묵
 2005.4.03.

 89회.「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김환균

 2005.4.10.

 90회.「허문도와 국풍 81」- 강지웅

 2005.4.24.

 91회.「한국의 진보」1부-공장으로 간 지식인들 - 한학수

 2005.5.01.

 92회.「한국의 진보」2부-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 한학수

 2005.5.08.

 93회.「한국의 진보」3부-혁명의 퇴장, 떠난 자와 남은 자 - 한학수

 2005.5.15.

 94회.「무등산 타잔 박흥숙」- 김동철

 2005.5.22.

 95회.「스포츠로 지배하라 - 5공화국의 3S 정책」- 강지웅

 2005.5.29.

 96회.「10.26 궁정동 사람들」- 장형원

 2005.6.05.

 97회.「프락치」- 유 현

 2005.6.12.

 98회.「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폭개발」- 박건식

 2005.6.19.

 99회.「2005 한반도 위기, "북한은 핵을 갖고 있다"」- 조준묵

 2005.6.26.

 100회.「7년의 기록」- 이정식

   
 
 
   
육영수와 문세광 (조준묵)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중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고, 그 과정에서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사건 직후 정부는 북과 연결된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목적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광복절 행사장에서 영부인 육영수를 저격한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최초 수사를 나갔던 당시 시경 감식계장 ‘이건우’, 사고 현장에서 취재를 하고 있던 CBS 특파원 ‘부루스 더닝’, NHK 논설위원 ‘야마모토’등 사건과 관련된 단체와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근거자료가 제시되며 ‘범인이 과연 문세광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육영수를 죽게 한 총탄은 누가 쏜 것인가?

   
   
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김환균)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고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은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의 배후 조종을 받아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조직으로 규정된다. 1975년 2월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대부분 풀려나지만, 인혁당 관련자 8명은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후 채 20시간이 지나지 않아 8명 전원이 사형 당하고 만다.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 사건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데는 미국인 신부와 목사의 위험을 무릅쓴 투쟁이 있었다. 감리교선교회의 조지 오글(George E. Ogle) 목사와 메리놀선교회의 제임스 시노트(James P. Sinnott) 신부가 그들이다. 그들은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알리고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대한민국은 그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답했다.

인혁당 사건 30년을 맞아 긴급조치 시대에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향상을 위해 싸운 푸른 눈의 투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허문도와 국풍81 (강지웅)
   

81년 봄 여의도 광장의 ‘국풍 81’이라는 관제행사를 필두로, 이후 80년대 내내 정권유지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구호, 88올림픽유치에 성공했다. 82년엔 야간통행금지가 풀리고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영화 검열이 약화되면서 극장에는 에로영화들이 넘쳐났고 안방엔 본격적인 컬러 TV 시대가 시작됐다.

국민들은 스포츠로 울분을 토하고 스크린을 통해 위로를 받았으며 향락과 퇴폐 문화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바야흐로 스포츠의 왕국, 에로영화의 천국, 섹스산업의 메카로 성장해간 80년대, 그 뒤엔 5공 신군부의 우민화와 국민 순치라는 고도의 정치적 음모, 이른바 ‘3S 정책’이 있었다.

치밀한 집권 시나리오를 통해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의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었지만, 민중의 피로 세워진 정권이라는 악명은 5공의 큰 부담이었다. 이후 5공화국은 70년대와 질적으로 다른 정책을 통해 80년 5월의 기억을 지워나간다. 정권을 잡자마자 대대적인 정치인 숙청과 삼청교육대 등의 공포정치 한편으로 약한 통치명분을 보완하기 위해 신군부가 주력했던 것은 ‘문화’를 ‘정책화’하는 것이었다.

‘금지곡’으로 대표되듯 70년대가 무조건적인 규제와 억압 위주였다면, 80년대는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외래문화들을 강제 주입시키던 시기였다.

   
   
한국의 진보 1부 :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 (한학수)
   

광주 민주화운동은 한국 사회에 격렬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른바 민중 지향적 운동을 탄생시킨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60, 70년대 지식인과 보수야당이 주도했던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반성하면서, 한편으로는 80년대 전반기 군부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기층 민중’을 중심에 놓아야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운동권 세대가 양산된 것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민주화된 정의사회’를 꿈꾸며 공장으로 들어가 시대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그들은 공장에서 어떤 일을 했으며, 노동자들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결국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인가?

80년대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은 최소 3,500~10,000명에 이른다는 학계의 연구결과가 있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원희룡, 김문수, 송영길 등의 현직 국회의원들 뿐만 아니라 숱한 지식인들이 위장취업을 감행하던 열정의 시대였다. 그들은 왜 위장취업이라는 선택을 한 것인가?

   
   
한국의 진보 2부 : 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한학수)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지하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지하조직들은 ‘사상’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시민봉기를 통해 군부독재를 타도해야 한다는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사회주의를 꿈꾸며 활동해온 현장조직으로, 1991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전국적 지하정당을 만들었다. 인민노련은 왜 주체사상파와 끊임없이 대립했는가? 그들은 왜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된 정치조직을 만들었으며, 어떻게 지하정당을 만든 것인가?  그동안 지하 정치조직에 관한 역사는 대단히 신비화되거나 혹은 단편적으로만 전해져왔다. 혁명을 꿈꾸었던 인민노련, 그 조직의 실체를 밝혀본다.

   
   
한국의 진보 3부 : 혁명의 퇴장, 떠난 자와 남은 자 (한학수)
 

 

90년대 '혁명의 모델'이 붕괴되고 민중당 실험이 실패한 후 겪었던 진보운동세력의 고뇌와 좌절에 대한 이야기다. 동구권의 붕괴와 소비에트 해체를 맞아 한국의 좌파들은 어떤 충격과 혼란을 겪게 되었는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은 혁명의 이상이 퇴장한 후, 각각 어떤 길을 걷게 되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80년대식 운동이 쇠락해가며, 여기에 관계했던 숱한 사람들이 변신하고 또한 상처와 회한을 갖고 있다.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들이 역사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한국의 진보' 3부작은 진보세력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에 반영된 '보수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난 25년간, 한국의 진보가 가졌던 열정과 한계 그리고 오류를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진보진영의 성찰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아울러 이들과 동반해야 할 '건강한 보수'에게도 시사점이 있기를 소망한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김동철)
 

 

1977년 4월20일, 전남 광주시 학운동 소재 무등산 중턱 증심사 계곡 덕산골에서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러 갔던, 당시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7명 중 4명이 살해되었다.  박흥숙(당시21세)이 철거반원들을 포박한 후 쇠망치로 머리를 가격해 살해한 일명<무등산 타잔>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도시빈민 문제라는 핵심에서 멀어진 채 사건의 엽기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알려 졌다.  당시 중학교 진학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었던 “도시 빈민 박흥숙”의 모습은 가려진 채 1980년12월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도시빈민 박흥숙이라는 한 청년이 국가권력의 무책임한 행정 집행 과정 속에서 희대의 살인마로 변하는 과정을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사후 처리까지 밀도 있게 취재함으로써 드러낸다.  특히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박흥숙의 비범함과 가난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용직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철거 작업을 하다 변을 당한 철거반원들,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살아온 유가족들의 모습은 사건을 무마하고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했던 당시 행정 책임자들의 행태와 비교되면서 국가권력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분노와 의문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이야기 하는가?

70년대 급속한 경제개발 속에서 드러난 개발독재와 아무런 생계 대책도 없이 이루어진 강제철거 정책의 실상을 밝혀내고 동시에 가려진 “도시빈민문제”를 재조명함으로써 경제개발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국가의 책임방기와 그 피해자들인 도시빈민들의 현실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스포츠로 지배하라 - 5공화국의 3S 정책 (강지웅)
 

 

광주 민주화 운동을 피로 진압한 5공 정권에게 광주는 원죄(原罪) 그 자체이다.  잘못된 시작.  정통성의 결여. 81년 출범한 5공 정권의 가장 큰 고민은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어떻게 ‘무마(撫摩)’하느냐는 것이었다. ‘스포츠 공화국 - 5공화국의 3S 정책’은 이런 관점에서 5공 초기 일련의 ‘개방화’ 정책을 3S 정책의 일환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5공 초기 일련의 개방화 정책이 집중된 것은 1982년이다. 1월 5일의 통행금지 해제조처를 필두로 두발과 교복 자율화가 시행됐다.   밤의 규제가 풀리면서 향락문화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심야영화로 상영된 ‘애마부인’은 그 해 최고의 관객동원을 기록하며 바야흐로 에로영화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체육 분야.  이전엔 문교부 산하 ‘체육국’으로 ‘국(局)’ 차원으로 존재했던 체육정책기구가 ‘체육부’로 격상됐고 정권의 2인자 노태우가 초대 체육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그 전 해에 극적으로 유치된 88 올림픽의 거국적인 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프로 스포츠 시대가 열렸다.  프로야구의 화려한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개막식에서 전두환이 직접 시구(始球)까지 했다.  만개(滿開)한 프로 스포츠 시대는 그 다음 해의 프로 축구와 프로 씨름으로 절정에 이르렀고, 심지어 바둑까지 프로화 됐다.   

1982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어떻게 봐야할까?

본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올림픽 유치결정과 올림픽 유치에 목숨을
걸다시피한 숨은 뒷얘기들, 청와대가 깊게 개입해서 불과 3개월만에 재벌그룹들을 동원해 프로야구를 급조(急造)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왜 5공 정권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1982년을 기점으로 하는 일련의 개방화 조치들과 프로 스포츠의 출범, 올림픽 붐 조성이 뚜렷한 목적의식하에 행해진 기획의 산물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3S 정책이란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섹스(sex)’를 동원해 대중의 관심을 비(非) 정치적인 사안들로 돌리려는, 일종의 대중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  사실 ‘3S 정책’은 학문적으로 개념화되기 이전에도 이미 모든 형태의 ‘비민주적인 정치체제’ 아래서 엿보였던 것들이다.  대중들의 관심이 정치에 쏠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의 통치술(統治術)인 것이다.

   
   
10.26 궁정동 사람들 (장형원)
 

 

10.26에 대해, 주범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했다.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은 김재규의 성격적인 결함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말했고, 계엄 하 합동수사본부는 김재규가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고, 권력 찬탈을 기도한 패륜적 범죄라고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리고, 논란은 김재규 사후 2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평행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당시 현장에는 현장에서 즉사한 6인과, 김재규와 함께 형장에 오른 5인 외에 30여 명의 궁정동 요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근접 거리에서 사건을 경험했고,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총격 당시, “김신조 일당이 다시 쳐들어온 줄” 알았던 급작스러웠던 상황에 대해, 연회상을 차렸던 대통령 요리사 김일선, 10년째 대통령 접객을 담당해왔던 사무관, 거사 실패 후 박흥주 대령과 절망적 방황을 했던 중정부장 운전담당 유석문, 당일 김재규가 사용한 총을 묻은 죄로 3년형을 구형 받은 경비원 유석술 등, 현장에 있었거나, 10.26 근처에 근무했던 경비원들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고, 이를 통해, 26일 오후 4시부터 27일 오전 7시까지, 10.26을 미시적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프락치 (유 현)
 

 

현대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희생을 무릅쓰고 민주화와 사회진보를 주장해 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공안’의 이름으로 감시하고 추적해 온 국가기관은 조직 안에 내부 정보 제공자(프락치(Fraktsiya) : 조직 안에서 신분을 가장한 채, 은밀한 활동을 펼치는 사람)를 심어두는 방식을 관행처럼 이어왔고 그것이 이른바 ‘사찰공작’이다.  사찰 공작이란, 운동가 혹은 그의 주변인물에게 접근, 협박과 회유를 통해 공안기관에 협조토록 한 후, 그 약점을 빌미로 점점 더 많은 정보 수집을 요구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조작에까지 이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숱한 의문사가 발생하였고 프락치 활동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구타, 사망사고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공안사건의 이면에 존재해 온 ‘프락치 공작의 어두운 실상’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또한 그러한 공작에 직접 관련된 인물들의 진솔한 인터뷰를 통하여 가족, 동료, 친구 간에 벌어졌던 ‘공안의 이름으로’ 자행된 반인륜적 행태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우리들 정신 내부에 극단적 의심과 광기의 상처를 남긴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이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주변 모두를 ‘시대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 공안당국 ‘프락치 공작’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돌아 볼 때이다.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폭개발 (박건식)
 

 

2차대전중에 극비로 개발된 일본의 원폭개발

일본은 2차 대전 전범 국가이지만, 원자폭탄에 관한 한 언제나 피해국가였음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최근 기밀자료에서 일본 역시 2차대전중에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었음이 속속 드러나고있다.  일본은 육군성의 주문으로 1941년 세계적 물리학자 보아의 제자이자 아인슈타인의 친구인 니사나 박사를 중심으로 동경대 이화학 연구소에서 원폭개발에 착수했다. 이 연구의 이름은 ‘니코연구’였다.  1942에는 해군에서도 교토대의 세계적 물리학자 아라카츠 박사를 중심으로 원폭개발에 착수했다.  이러한 원폭개발에는 당시 가장 앞서있던 나찌의 히틀러와의 유대가 큰 힘이 되었다. 일본과의 연대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던 히틀러는 비행기,잠수함을 통해 원폭개발에 필요한 우라늄과 장비를 지원해주었다.  실제로 독일잠수함 U-234호는 독일이 패망한 그 순간 바다속에서 우라늄 10박스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행해진 일본의 원폭개발

일본에서 행해지던 원폭실험은 얼마후 북한으로 옮겨지게 된다.  B-29의 맹폭으로 기반시설이 와해돼 원폭개발이 어렵게 되자, 전력과 우라늄 등의 광석공급이 용이한 북한 흥남 질소비료공장으로 옮겨서 개발을 하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12일 흥남 앞바다에선 작은 원폭 실험이 있었다고 미국 정보장교 출신인 스넬과 미 방첩대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한 바로 이 날 소련군은 북한으로 진주해왔고, 일본 원폭개발 과학자들을 소련으로 잡아가고 흥남의 원폭시설을 점거했다. 북한에서 비밀리에 행해지던  원폭개발 인력과 시설은 이후 1949년 소련의 핵개발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련의 핵개발 노하우와 흥남의 시설은 다시 북한의 핵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오늘날 북한 핵개발문제의 근저에는 일본 원폭개발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개발된 소형 원폭으로 미국 본토에 가미카제식 자살공격을 퍼부어 불리한 전세를 단 번에 뒤집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원폭실험의 비밀은 1945년 11월에 오키나와로 진격하려 계획했던 미군이 왜 일정을 당겨서 8월6일에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는지, 왜 히로히토가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도 곧바로 항복을 하지 않았는지 2차대전의 의문을 푸는 단서를 마련해준다.  즉, 히로히토의 결사항전의 배후에는 원폭개발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원폭개발과 핵 재무장

최근 일본은 우경화 바람을 타면서 평화헌법 개헌 논의부터 자위대 파병,조기경보기, 이지스함마련에서부터 급기야는 핵무장에 대한 논의까지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마지막 금기라고 할 수 있는 핵무장 논의 역시 사실상 2차대전중의 원폭개발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  경제개발 제일주의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2차대전중의 원폭개발 망령이 경제에 대한 자신감과 미국의 지원을 업고 다시 한 번 부활의 날개를 휘저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2005 한반도 위기, "북한은 핵을 갖고 있다" (조준묵)
 

 

지난 2월 10일, 북한은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며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다.  미 군사전문가 윌리엄 아키은 지난 5월, 미국의 대북 핵 선제공격 비밀계획인 ‘콘플랜 8022-02’를 워싱턴 포스트지를 통해 폭로했다.   이 와중에 부시 미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독재자”로, 북한 외무성은 부시 미 대통령을 “도덕적 미숙아, 불망나니”로 비방하며 북미관계는 극단으로 치달아왔다.  제 2의 북핵 위기가 시작된 것은 2002년. 7월 1일 북한의 경제개혁조치 단행, 9월 19일 신의주 경제특구 지정, 9월 17일 북일 정상회담.  동북아에는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7월 발표된 제임스 켈리 방북에 대해 북은 환영 논평을 냈다.  10월 4일. 미 국무부 차관보 제임스 켈리는 북한의 외무성 1부상 강석주에게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P)에 대해 “우리는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발언을 듣는다.  귀국한 켈리는 10월 17일 “증거를 제시하자 북한은 HEUP를 시인했고 이로써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고 발표했다.  곧이어 미국은 11월 대북중유지원을 중단했고 한반도 주변에 병력을 증강하고 핵 항공모함 칼빈슨호를 배치하기에 이른다.  이에 북한은 폐연료봉 봉인 제거, IAEA 감시카메라 제거와 사찰단 추방, NPT 탈퇴로 맞대응하며 2차 북핵 위기는 전쟁위기로 치닫는다.  세 차례의 6자 회담에도 불구하고 올해 들어 위기는 보다 심화됐다. 북한과 미국 모두 “북한은 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도, 미국도 그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던 북한 고농축 우라늄을 둘러싼 진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북한 핵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2차 북핵 위기의 심층 취재를 통해 한반도 평화의 길을 모색해본다.

   
   
7년의 기록 (이정식)
 

 

99년 9월 12일, 긴 세월 동안 봉인되어 있던 한국 현대사의 진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 방송 사상 최초의 시도, 최대의 기록, 최다 아이템. 그리고 숱한 파장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현대사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100회를 맞이했다.

제 1회 「제주 4.3」을 시작으로 제 99회 「2005 한반도 위기 “북한은 핵을 가지고 있다”」가 방영되기까지 7년 동안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해온 레드 콤플렉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한미 관계,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폭력 등 다양한 아이템을 넘나들며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제작진은 이 과정에서 주요 증인들의 진술 거부, 관련 자료 폐기, 문서 비공개 등 무수한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보도 연맹(2부작)」,「한국 전쟁과 포로(3부작)」,「북파 공작원(2부작)」등 한국 현대사의 뒤안길에서 희생되었던 수많은 이들을 최초로 조명했으며 고하 송진우 암살범을 비롯, 사건의 가해자 혹은 책임자들을 추적하여 진실에 한발 더 다가서려 했다.

100회 특집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7년의 기록>에서는 폭력의 시대에 가려져 있던 역사를 재조명해 쓴 그간의 영상실록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