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관련 핫이슈들을 모았습니다.
정길화PD의 멕시코 현지 취재기 -6- (한인후손들편)
작성일 : 2005.01.24
조회 : 

멕시코, 쿠바에서 활약하는 3, 4세 한인후손들의 성공담!
하원의원, 주 대법원장,병원장, 화가, 연주가 등 국내 첫 소개!!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3부작 2005년 2월 20, 27일 (일) 방송!!   

274명으로 출발한 쿠바의 한인은 74년이 지난 지금은
800에서 900여명 내외의 한인 후손들이 아바나를 비롯,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마나티 등 쿠바 각처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의 후손인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한인회가 복구되고 있다. 헤로니모는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 법대를 다녔고
쿠바 혁명에도 참여하여 이후 차관급인 식품관리청장을 지낸 바 있다. 이외에도 의사 등 전문직업군에
많은 한인 후손이 있고 예술계에는 화가 알리시아 데라 깜빠 박, 쿠바 음악 연주가 세실리오 박 김 등이 있다.

취재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을 소개한다.


 

 # 노라 유 (Nora Yu Herandez)
  
- 정치적 야심만만한 멕시코 한인후손 중 첫 하원의원

멕시코 하원의원(PRI 제도혁명당 소속), 지역구는 치와와 주,
후아레스 시.
노라 유는 에네껜 이민 1세 유진태의 증손녀다. 기계(杞溪) 유씨 가문으로
유진태는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兪吉濬)의 종숙(宗叔)이라고 한다.

유진태 일가는 처음에 메리다 레판 농장에서 일하다 노라 유의 아버지
엔리케 유가 14세 때 베라크루스로 이동하였고 다시 그가 17-18세 때
멕시코주로 이동하였다. 당시 엔리케는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시우닷 후아레스로 이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후아레스에서 살아야만 했는데 이때부터 돈을 모아 후아레스에서는 최초의 수퍼마켓을 열었다.노라 유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하면서 부를 축적해 오늘에 이르렀다.

노라는 엔리케의 7남매 중 장녀(1남 6녀).
노라는 학창 시절부터 리더쉽을 발휘하였는데 모임을 만들어 리더가 되곤 하였다.
후아레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은 국경너머 미국 텍사스의 엘파소에서 다녔다. 대학 졸업 후,
동창생과 첫 멕시코협회를 설립, 기업이나 기관과 관련된 민원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이것이 정치계 입문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후아레스 최초의 여성 상공회의소 소장을 역임하였으며
후아레스 시 무역협회장을 재임하기도 했다. 10년째 관세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녀에게 좌절도 있었다. 두 차례 후아레스 시장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
2003년에 마침내 후아레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지역에서는 12년만에 처음으로 PRI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멕시코 국회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등원 이래 지금까지 10개의 의안을 제출하는 등 맹활약을 하고 있다. 최근 그녀가 역점을 두는 것은
국제무역법 개정 문제. 이를 위하여 지난 5개월 동안 법률 개정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항상 보람을 느낀다. 나는 정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노라 유.
여기까지 오기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동양계라서 외모가 일반 멕시코 국민들과 달라
유권자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시간이 더 걸린다. 또 여자라서 세계의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보다 두 배 이상 일해야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동료 의원인 레베카 고디네스 브라보 의원의 평가 : "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당에서도 인정할 정도,
의회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고 많이 하는 여자, 노라 유. 그래서일까 그녀는 미혼이다.
"내 인생 자체가 일로 가득차 있다. 나를 일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나면
결혼할 용의가 없지 않다" 고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일하느라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는 나를
어느 남자도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 이라고 말한다.

장차 포부 그녀는 "앞으로 후아레스 시장이 되고 싶다. 먼저 시장이 되고 그리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울 것이다"고 거침없이 향후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말한다.


 

 # 리스벳 로이 송(Lizbeth Loy Song Encalada)
  - 동양계 이민, 여자라는 약점 극복한 철(鐵)의 대법원장

한인 4세 후손으로 낀따나 로(Quintana Roo)주의 주 대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51세.

낀따나 로 대법원은 8개 사법 관할권에 분산되어 있는
21개의 1심 재판소와 2심 재판소의 역할을 하는 3개의 재판소로
구성되어 있다. 낀따나 로 주 관할구역에 속한 모든 시민들과 관련된
사건과 기타 낀따나 로 주 법원으로 이첩되는 민형사, 상업, 가정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증조 외조부(외할머니의 아버지)인 후안 장(양재호)은 한국에서 양반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플로렌시오 송, 어머니는 중미 벨리스 출신 떼레사 엔깔라다.
조부모는 야스꼬뽀일 농장,티물 농장 등의 에네껜 농장에서 열악하게 일하였다.
결국 농장에서 나와 재래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면서 생업을 도모하였다.
아침 일찍 야채를 씻고 다듬어서 시장에서 파는 가격보다 싼 값으로 팔면서 돈을 벌었고
나중에 시장 안에 야채, 과일 가게를 내는 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가족들이 유카탄 반도 전역으로
흩어졌고 나중에는 티후아나까지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스벳은 "아버지는 굉장히 노력하는
근면한 사람이었다. 단 한푼도 없이 장사를 시작해 왕국을 이루었다. 장사에 특출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집념이 강한 분이었다" 고 술회.

리스벳은 유치원, 초, 중학교를 체뚜말에서 다녔다.
당시 체뚜말에는 상급학교가 없어 11년 동안 고생하면서 메리다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유카탄 법대를 졸업했고 또 유카탄 일반대의 여름학교 과정을 7년 동안 다니면서
스페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법대 학사증과 스페인 문학사증 등 두 개의 졸업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결혼 후 1981년 낀따나 로 주로 돌아왔다. 남편은 사업가며 슬하에 두 딸과 아들이 있다.
1982년 주 법원 가정판사로 임용되었으며 민사부 판사, 정원외 대법관을 거쳐 1992년 정규 대법관이
되었다. 2000년 3월에 주 대법원장이 되었다.

주 대법원장이 된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비결은 없다. 강직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것밖에 없다.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으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는다."고 단호히 대답하였다.

한인 후손으로 또 여자로서 불리한 것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동양계 이민의 후손이라는 것은
약점이 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있었다. 그러나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자리로 승진하면서 남들보다 뛰어날 수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똑같은 입장의 한인 후손 여성이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어떤 충고를 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라. 목적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인생에는 쉬운 일이 없다”는 쉽고도 어려운 답을 준다.
 

 

 # 뻬드로 가브리엘 총 킹
  
- "세 번의 선택이 나를 만들었다"는 티후아나의 아동자선병원장

띠후아나 캘리포니아 아동협회 병원 원장. 성의 '총 킹'은 '정 김'의
변형으로 보인다. 그는 캘리포니아 지역 어린이를 위한 의료 봉사 기관의 설립자이며 책임자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 있는 사립 자선 병원재단인
이 재단의 공식 이름은 "빠라 로스 니뇨스(PARA LOS NINOS)"
즉 '어린이들을 위하여' 다.

그는 국립 멕시코대(UNAM) 의과대를 졸업하고 소아내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띠후아나 소아내과에서 의사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정부에서 후원하는 어린이 병원인 니뇨 리포 병원 원장으로
3년간 재직했다.
이 병원은 그 후 운영 주체가 바뀌었지만 13년간 원장으로 일했다. 1989년 캘리포니아 협회를 설립해
어린이 의료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는데 91년에 이에 관한 정부의 승인이 떨어졌다.
1992년 띠후아나에서 모금운동을 시작했고 정부와 시민의 지원을 받아 병원을 건립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이 병원에서는 십만 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였으며, 천오백건이 넘는 수술을 실시했다.
진료뿐 아니라 교육도 실시하는데 의과, 간호과생을 대상으로 나아가 선생과 부모님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도 있다.

이 병원은 영업목적을 가지지 않는 의료기관으로 의사들도 대부분 무상으로 자원 봉사를 하며
재정은 모금운동과 기업, 동호회, 프로 스포츠팀 등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한국의 삼성과 현대에서도
기부를 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경제력을 고려하여 의료비를 부과하는데 형편에 따라
전액 지급에서 전액 무상까지 차등화된다. 환자들은 평균 50% 정도의 의료비를 부담한다.
이렇게 병원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뼈대가 뻬드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의 할아버지는 호세 김, 할머니는 마리아 윤, 두 사람 다 서울에서 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베드로 정, 외할머니는 마리아 엘리나 장. 그가 기억하기로 조부들은
멕시코에 양파 농사를 지으러 왔다고 한다. 단기간만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이곳에서 평생 머물러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유카탄에서 초보적인 형태의 사업을
하였다. 그러다 다른 한인들의 소개로 1952년 띠후아나로 왔다가 마음에 들어 이듬해 아예 이주를 했다.
그가 기억하는 메리다는 무더운 날씨가 전부다. 가족들은 날씨가 더워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항상 물을 떠서 몸에 부었다니 한인들은 더운 날씨에 줄곧 등물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모두 세 번의 선택과 결정이 있었다.
한국에서 멕시코로 온 할아버지, 유카탄에서 띠후아나로 온 아버지 그리고 의과 공부를 하기로 한
그 자신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할아버지의 선택이 좋았다 나빴다 판단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중에는 그 결정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버지가
유카탄에서 이곳 띠후아나로 온 것은 참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개인적으로 의과대를 진학한 것은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을 거의
무료로 다닐 수 있었다. 단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기만 하면 대학에서 학비 부담을 덜어 주었다.
경제적인 면을 떠나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일이다." 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다른 한인 후손에게와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용모에서 한국인 혹은 동양인으로 두드러져 보여 불리하거나 어려운 것 없었나?"
이에 대해 그는 단호히 "아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에게 조금 놀림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 동양인의 모습이니까 사람들 앞에 더욱 정직해 보여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부모님의 정직함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의 부모님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을 진 적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남들에게 다정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평도 좋았다.
" 띠후아나의 병원에서 알게 된 멕시코 간호사와 결혼한 그는 자식 농사도 잘 지어
큰 딸은 미국에서 일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둘째는 긴급 시스템을 관리하는 컴퓨터 엔지니어
막내는 병원에서 일하는 심리학 박사다."
 

 

 # 라몬 리 레혼(Ramon G. Lee Rejon)
  
- 유카탄 반도 치첸 잇사의 마야문명 지킴이

유카탄 마야 유적지 치첸잇사(Chichen Itza)의 관리소장
(Coordinador Unidad 고고학 유적지 문화 및 관광 업무 조정관).
라몬은 메리다의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는데
정부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1979년부터 정부에서 일하기 시작,
처음에는 농장총국 감시관으로 근무, 이후 우스말 유적지 공연연출 담당,
이어서 시비찰툰, 셀레스툰 등 고고학 유적지 감시관 등으로 재직.
2002년 멕시코에서 가장 큰 고고 유적지중의 하나인 치첸잇사 감시관으로
진급하였다. 지금까지 25년간 공무원으로 근속중이다.  

라몬이 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야 유적지 치첸잇사의 관리 책임인데 이 일은 고고학 유적지의
관련 지식을 터득하고 유적지 내 근무하는 다양한 분야와 관련된 문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치첸잇사는 하루에 5천-6천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데 대부분 유럽인들이다.
관리소 직원은 현재 모두 39명이다. 이들은 유적지 안내를 필두로 매표, 경리, 수공예업자,
INAH(멕시코 국립 고고역사연구소) 소속 연구원 등이다. 이중 4명의 고고학자는 1994년부터 치첸잇사내
미개방 지역을 계속 조사 연구중이다. 요즘에는 한국인 관광객도 적잖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이들은 주로 칸쿤을 거쳐 오는데 하루 40여명 수준이라고 한다.

라몬은 1958년생인데 한인 후손으로 3세다. 그의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멕시코로 왔다.
라몬은 "할아버지는 돈보다는 새로운 인생길을 찾기 위해서 왔다"고 할아버지의 멕시코행을 평가했다.
라몬의 할아버지는 멕시코에 혼자 왔고 이후 유카탄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라몬의 한국 성은 이씨다. 성씨의 유래를 아는지 묻자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온 것은 아는데
성씨의 내력은 모른다. 무슨 나무의 뜻을 가졌다고 옛날 누구한테 들었다."고 말한다.
李씨가 오얏 이씨라는 것을 말하는 걸까. 취재진이 체뚜말에 사는 그의 아버지에게 확인하기로는
할아버지의 한국 이름은 '이기삼'이었다.

어린 시절 라몬은 낀따나 로 주의 주도(州都)인 체뚜말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궤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이
있었다. 잡지도 있었고 무슨 종교적인 물건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이라니 당장 취재진이 그 소재를 묻자 라몬이 웃으며 답한다. "글세. 그것이 지금
남아 있다면 참 좋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없다. 한 40년 전에 이 지역에 큰 태풍(허리케인)이 엄습했는데
폭풍우와 해일이 전 도시를 휩쓸면서 궤짝도 떠내려가버렸다. 허리케인의 이름은 야넷인가 그랬다.."
아쉽기로는 취재진이 더할지도 모르겠다...

한인 후손으로서 이곳 치첸잇사에 요즘 들어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에는
그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한국은 옛날에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고
크게 성장을 한 나라다. 특히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에서 유카탄에 100만불 짜리 병원을
기증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랑스럽다. 정말로 대견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희망은 언젠가 한국에 가서 한국문화와 역사를 접해보고 싶은 것이다.
또 있다. "5년 뒤 나는 이곳에서 퇴직하게 된다. 공무원으로 한 30년 일하는 셈이다.
그 때 여기서 여행사를 차려 이곳에 오는 한국 사람들을 모시고 싶다. 한국과의 인연을 끊지 않고
한국인들의 지속적인 치첸잇사 방문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그의 소박한 소망이다.
 


 

 # 앙헬 에레라 김
  - 나는 한인 후손" 늘 커밍아웃하는 베라크루스
    최고급 법의학 전문가

부산 출신 김발명(金拔明)의 후손.
한인 3세로 그는 멕시코인 안토니오 에레라 아고스따와 한국계
글로리아 김 공의 아들. 43세.

베라크루스 주 꼬앗사꼬알꼬스 시 검찰청 법의학자로 근무하며
검시 해부 등을 맡고 있다. 낮에는 보건 사무처장, 오후에는 내과 전문의로
외래치료, 밤에는 골포 데 멕시코대학 교수로 강의하는 1인 3역. 그의
하루 일과를 보면 오전 9시에 검찰청 법의학실에 출근해 1시에 퇴근한다.

오후에는 살루브리닷 종합병원에서 2시부터 8시까지 일하고 이어서 8시부터 9시까지는
골포데 멕시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이렇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바쁘게 일한다.

그는 꼬앗사꼬알꼬스에서 태어나 3살 때 집안이 인근 할라빠로 이사를 했다.
유치원부터 외과전문의 교육까지 모두 할라빠에서 받았다. 이후 꼬앗사꼬알꼬스로 돌아와
법의학교육을 마치고 검찰청에서 근무한지 11년째다. 그는 또 법률암호학(거짓말 탐지기) 석사 과정을
일하면서 마쳐 베라크루스 주 전체에 4명밖에 없는 법률암호학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멕시코 출신 로시오 바리엔또와 결혼, 아들 하나(앙헬 에레라 바리엔또)

*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당신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걸었던 애초의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개인적으로 만족한다.
    부인과 아이 등 내 가족이 생활의 원동력이다. 정신과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인 후손이라고 주변에 커밍아웃 하는가? 자신이 한인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늘 내가 한인 후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달리 눈에 띄는 나의 성(김) 때문에
    사람들이 먼저 물어 보기도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또 영광이다. 주변에 나이 많으신
    한인 친척 중에는 젊었을 때 한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언어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치노 치노...라며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인 후손임을 밝히면
    나를 분명히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중에 당신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한인 후손으로서 나는 어머니의 근면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멕시코인 아버지는 변호사로서 늘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한국쪽 우리 조상의 고향은 부산으로 알고 있다.
    언제가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내 여행을 하게 하고 싶다.
    마누라는 내가 있던 병원에 맹장 환자로 왔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을 했다..."


 

 # 알리시아 데 라 깜빠 박
  - "내 안에 동양적 신비가 있다." 그림에 담긴 한국인의 혼

"명상과 정신적인 뭔가를 추구하는 거에요.
평안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환상적인 내용도 있고..
항상 존재하는 내용이지요. 환상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종류의 작품이건 환상적인 내용은 기본적인 거에요"

눈이 아리도록 선명한 색채로 표현된 그림이 잔뜩 걸린
알리시아의 작업실. 난해한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 알리시아가 정의내린
한 마디는 바로 '신비'다.
1966년 아바나에서 스페인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쿠바에서 살아온
알리시아 데 라 깜빠 박(39세).

그녀는 미술 전문 아카데미 뿐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 미술 강의를 하는 화가다.
산 알레한드로 아카데미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고 고등교수원에서 조형예술 학위를 받았다.
쿠바 국립 예술작가협회(UNEAC) 회원이다. 1987년 아바나 시 ‘꼰차 페란트’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한 이래 2003년 아바나의 조형예술 센터와 멕시코의 문화센터에서 각각 전시회를 하기까지
모두 8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그 외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일본,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파나마 등에서 열린 기념전이나 합동전에 참가한 것은 허다하다. 회화, 소묘,
일러스트레이션, 조각, 캐리커처 등에서 시각적으로 다양한 표현 양식을 가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취재진에게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소개한다.
쿠바를 상징하는 야자수와 섬나라라는 통제된 상황에서 문화적,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억압받는
여성의 모습이 유독 많았다. 외모적으로도 동서양의 미가 절묘하게 혼합된 알리시아의 매력은
그녀의 작품에서도 신비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녀의 남편이자 화가로서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는 시네시오 후에다라는 "그녀는 인간적으로 좀 신비한 면이 있는데 그런 게
작품에도 나타나요. 하지만 자신은 그걸 느끼지 못해요. 아시아 계통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그런 유전적인 측면이 그녀 안에 내포되어 있고 그게 자기도 모르게 표현되나 봐요.
선이나, 느낌, 정교함 그리고 색채에서도요”라며 동료 화가이자 남편으로서의 평가를 내렸다.
비전문가적 입장에서 보면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미라든지 소박하면서도 고고한 멋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반응에 "알리시아는 쿠바에서 태어났고 당연히 쿠바풍의 작품을 그리죠.
하지만 인지 형상을 그릴 때 있어 그런 쪽에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동양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특히 선 같은 데서요" 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요즘 그녀가 몰두하고 있는 작품은
100년 전 멕시코와 쿠바로 건너 온 조상들에 대한 경의를 표현 한 작품.
에네껜이 촘촘이 즐비한 밭 가운데 한복을 입은 그녀의 조부모(혹은 이민자 전체의 대표)가 서있고
하늘에는 태극 형상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노스텔지어지요. '엘 볼로' 에 살 때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부모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즐거웠던 시절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들을 감싸고 있는 우수나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그 고통에 대해 공감했기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그림이 제 첫 번째 시도인 셈이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을 중시하는 그녀의 예술관이 아담하게 표현된 이 작품은
다른 그녀의 작품들에 비교할 때 한국적 정서가 강하게 묻어난다. "그 분들은 새로운 현실에 동화하려
했어요. 그 분들도 자신들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선택을 한거고 제가 그 분들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판단을 할 수도 없어요. 어쨌든 그분들로 인해 제가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가 끝나자 자리를 잡고 앉아 붓을 들어 마무리 작업을 한다.
에네껜 밭 뒤로 지는 붉은 노을이 한인들의 한맺힌 이주 100년사의 고통의 궤적을 드러내는 듯하다.


 

 # 세실리오 박 김
  -
"저도 한 쿠바 음악 합니다" 바라데로의 한인 연주가


쿠바 아바나 근교의 싼따 만따 바라데로에 살고 있는
세실리오 박 김은 현재 ‘체프 바라데로’라는 식당에서 노래와 연주를 한다.

한인 3세로 올해 나이 일흔 일곱, 그를 포함한 3인조 밴드의 리더다.
지금으로부터 46년전인 1959년부터 음악을 시작한 그는
이 분야에서는 베테랑이라고 자부한다. 쿠바 음악은 서정적인 선율과
복잡한 리듬이 특징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두드릴 것이 있으면 두드린다는'
그들의 속담처럼 타고난 무언가가 쿠바인들에게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순수 한인의 피를 받은 그가 쿠바 음악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제가 따르던 형이 쿠바 음악을 연주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의 연주를 보고 들어서인지 음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세실리오는 이런 질문이 기우라는 듯
"전 한인 혈통이지만 쿠바 태생이고 쿠바 음악을 들으며 자라 그 리듬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음악을 쉽게 배우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쿠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자신감에 찬 어투로 말했다. 그의 동료 에우헤니오 기예르모 라미레스 라미레스도 세실리오에 대해
"쿠바인의 음악성을 타고 난 사람"이라며 칭찬하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발전시키는 노력과, 재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7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예술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 듯 했다.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도 발장단까지 맞춰가며 들썩일 때는 노익장마저 느껴진다.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쿠바의 전통 음악인 "손(Son)"이다.

그럼 한국 전통 음악을 연주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캐나다에서 온 스승님께서
한국 음악과 한국어를 가르쳐 주셨는데 중병이 드셔서 그만두셨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잊게 된 거죠." 라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아리랑, 애국가에 노사연의 만남까지는 부르고 연주할 줄 안다.

인터뷰의 말미에 세실리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늘 마음속에 담아왔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제가 죽기 전에 제 조상의 조국에 가보고 싶습니다.
가서 쿠바 음악을 소개하면서 할아버지의 나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예전에도 그랬도 지금도 그렇고
후손들의 최대 희망은 조상의 나라를 밟아보는 것이다.
100년만에 찾은 후손이 당당한 발걸음으로 입성해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 넬슨 울리세스 임 장
 
- 불혹의 나이에 한국을 배우는 경제학 교수

쿠바 한인중 독립운동가로 한국 정부의 훈장을 받은 임천택,
그리고 그의 아들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한 뒤
차관급인 식품청장을 지낸 헤로니모 임 김. 이 혁혁한 집안의 장남이
바로 넬슨 울리세스 임 장 교수(42세)다.

드물게 순수 한인의 피를 이어받은 넬슨씨는
산띠아고 데 쿠바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그런 그가 지난해 11월부터 낯선 서울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재외동포 재단의 지원으로 경희대 국제 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가족들(부인과 1남 3녀)과 직장을 두고 한국행을 결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우선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쿠바 한인 공동체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약 800명의 후손이 있는데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내가 한국어를 구사하게 된다면 유구한 전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해 11월 당시 넬슨 교수는 독선생을 두고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익숙하지 않은 한국 발음을 익힌다. 약간 수줍은 듯 한마디씩 따라하면서도
눈빛만은 누구보다 빛났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꼭 배우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더 배우기 위해 제 모든 시간을 투자하겠다.” 그에게는 한국의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
하지만 그만큼 도전의 대상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말도 안통하고.. 커피 자판기를 이용하는 법도 몰랐다"
그는 비단 한국어만을 배우기 위해 이 머나먼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서울의 중심지와
한국 문화와 관련된 주요 지역을 가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득하고 싶다.
그리고 가족들이 살고 있는 산띠아고 데 쿠바에서 떨어져 아버지(헤로니모)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17세)도 언젠가 한국에 와서 공부하기를 희망한다. 외교 관계가 없어 멕시코의 한인 후손들에 비해
한국에 대한 정보가 더 취약한 쿠바의 한인들에게 조상의 땅, 조국의 실체를 제대로 전해주고
왜곡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아 주고 싶은 게 넬슨의 작은 소망이자 욕심이다.

한국에 온 소감과 앞으로의 각오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매우 기쁘고 좋은데 좀 춥다.
쿠바는 춥지 않으니까.. 하지만 한국의 추위에 대비해서 외투도 준비해왔고 정신적으로도
무장하고 왔다." 자못 비장하다. 100년 전, 보도 듣도 못한 멕시코라는 나라로 떠난 조상들,
거기서 또 다시 더 나은 삶을 위해 쿠바로의 모험을 택한 할아버지, 그리고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의 고향 한국으로 온 넬슨. 주어진 조건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그 가족의 모습에서 에네껜 한인의 원형을 본다. 넬슨 교수는 무엇을 뚜렷이 이루어서
여기 '한인 후손 성공시대'의 대열에 든 것은 아니다. 그의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 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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