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오케이 !"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촬영은 새벽 5시부터입니다."
밤 11시가 훨씬 넘은 늦은 시각. 나의 '컷' 소리와 함께 오늘 야외촬영도 모두
끝났다. 나를 비롯해 모든 스텝들과 출연자들은 이번 <그대 그리고 나>의
제작에 들어가면서부터 대본 연습, 야외촬영, 편집 그리고 스튜디오 녹화로
이어지는 빡빡한 촬영 일정때문에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지만, 우리가 만든
드라마에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큰 관심과 성원 탓에 피곤한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전부터 <그대 그리고 나>에 대한 매스컴의 관심은
대단했다. <전원일기>를 12년간이나 집필해온 김정수 씨는 인간의 따뜻한
내면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역량있는 작가였고, 나 역시 오랜만에 나름대로 큰 포부를
가지고 연출을 맡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의 큰 관심사는
화려한 출연진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최고의 스타급
연기자들이 한꺼번에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미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하는 일일 터이지만, <그대
그리고 나>에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는 나름대로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 역시 모두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드라마 속의 인물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우리 드라마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각각 다른 성격을
지닌 그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며 상처받기도 하고 갈등에 빠지기도 하며 또는
서로 보듬어 사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드라마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드라마를 젊은이들 취향에 맞춘
트랜디 드라마와는 달리 가족 모두가 함께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진짜(?) 가족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
차인표·송승헌·이본·김지영·서유정 등을 중심으로 하는 20대 그룹에서는
젊은이들의 꿈과 방황의 모습을, 극중 주인공인 박상원·최진실 등을 통해서는 갓 결혼
하여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30대 맞벌이 세대의 모습을 대변하게 했
고, 마지막으로 최불암·양택조·박원숙·이경진 등 40-50대를
겨냥한 중견 연기자들을 통해서는 원숙한 삶의 고민들이 배어나오게 만들었다. 이렇게
연령층별로 스타급 연기자들을 포진시킴으로써 다른 드라마에 견주어
좀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구성한 것이 다양한 시청자들의 욕구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여러 배역들 가운데 특히 최불암 씨가 열연하고 있는 동규아버지 박재천 역할은 바다사
나이로 혼자 살면서 과거의 아픈 사랑의 기억도 있는 50대로 건장하고 거친 듯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아주 여린 면이 있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또한 차인표 씨가 맡은 영규의 경우, 단 한번에 신분 상승을 꿈꾸는 야심과
욕망을 가진 사람으로 실제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역할이다.
나는 극중 배역들의 성격을 애매모호하게 만들기 보다는 재천이나 영규처럼
특이할 정도로 확실한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들을 봄으로써 또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도
록 '의도적인 캐릭터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이번 <그대 그리고 나>를 촬영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은 바로 지방 촬영이다. 연속극의
촬영 무대로는 조금 먼 거리인던 경북 영덕과 울진은 우리 드라마의
배경으로 더할 나위없이 잘 맞아떨어졌던 곳이다. 그래서 나는 물론 촬영 스텝 및 작가
와 그밖의 출연자들까지도 이곳에 많은 애정을 가졌다.
영덕의 푸른 바다는 극중 박재천의 이미지와 퍽 많이 닮아 있었다. 오랜 세월
거센 파도와 함께 살아온 삶의 굴곡이 느껴지는 바다, 삶의 치열한
각축장으로서의 바다. 이러한 거친 바다의 이미지가 수경을 중심으로 한 서울
장면들과 확실한 대조를 이루면서 작품의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영덕은 교통편이 좋지 않은 탓에 TV를 통해 보여진 것은 거의 처음이라
할 정도로 미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내에는 깊은 인정이 넘
치는 이곳 영덕 주민들의 큰 관심과 호응은 서울에서 예닐곱 내처 달려와 피곤에 지쳐
있던 우리 촬영 스탭들에게 늘 큰 힘이 되곤 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건 촬영 때마다 먹었던 회다. 아마도 내 평생 먹을 회를 이번
촬영을 하면서 한꺼번에 다 먹은 듯하다. 또한 근처 온천장을 숙소로
이용한 것은 다른 어느 드라마 촬영 때보다 단하나 스탭들에게 좋은 조건이었을듯하다.
영덕에서의 촬영 장면을 통해서 나는 <그대 그리고 나>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크고 넓으면서도 총체적인 이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영덕을 촬영
장소로 정한 뒤 이곳 어촌에서 받은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그래
서 드라마 초반에는 유난히 어촌 전체를 풀샷으로 잡은 장면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영규·상옥·민규 삼남매가 그들의 꿈을 펼치는 듯한 느낌으로 춤추던 바닷가 장면이라
든가,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이 물씬 묻어나던
새벽 바닷가 재천의 모습들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다.
주말마다 촬영시간에 빠듯하게 나오는 대본, 대본이 나오자마자 촌각을 다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텝들과 연기자들. 일주일 내내 편히 쉴 시간은 단 하루도 없다. 육체적 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겹쳐 잠시도 마음 편할
틈이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캐릭터들을 재창조해낼 때 또는 신인 연기자들의
눈에 띌만한 빠른 성장을 바라볼 때, 그런 순간순간 맛보는 작은 기쁨들은
드라마를 연출하는 새 힘으로 승화되어 힘든 것을 잠시 잊고 또다시 촬영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제 연출가로서 내가 할 일은 <그대 그리고 나>가 시청자들이 그저 단순히
보고 흘려버리는 드라마가 아닌 삶의 진실과 의미가 담겨있는 드라마, 그래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만드는, 감동이 있는 드라마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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