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우리 곁에 스며들 듯이 다가온 배우 지진희. 한 번도 배우되기를 꿈꾼 적이 없었지만 어느날 ‘운명적으로’ 배우가 돼 버린 그는 독특한 아우라를 지녔다.
그를 사랑한 감독들, 박광수 황인뢰, 그리고 이병훈…. 그들이 그에게서 읽어낸 분위기와 표정, 몸짓, 목소리에는 그만의 내음이 물씬 풍겨난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아직 배우로서 미완성된 부분’이라고 말했다.
미처 채워지지 않은 진한 ‘여백의 미학’을 갖고 있었다.
# 배우가 되기 전의 지진희
외동아들. 여느 외동아들처럼 그랬을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무언가 조물락거리며 만들기를 좋아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어린 몽상가였던 그는 자신의 예감을 믿어왔다.
“되고 싶은 건 없었어요. 그저 서른 살이 되면 무언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지요.”2000년, 그는 서른 살이 됐고 SBS ‘줄리엣의 남자’에 출연하며 예지원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승우 역을 연기하면서 ‘영원한 로미오’라는별칭이 따라붙었다.
학교 시절, ‘튀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있게 되더라’는 그는 그제서야 ‘아 내가 연기자가 되려고 했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라,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고.
그에게 ‘운명’이 찾아온 것은 1997년.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한 사진스튜디오에 소속돼 광고 사진을 찍어왔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배우를 해 보라는 집요한 제안이 따라왔다. 김혜수 전도연 등의 톱스타와 함께 해 온 현 사이더스의 박성혜 이사는 1년여간 그에게 배우로서의 데뷔를 권유했다.
“서른이 가까워 오는 나이인 데다 이제 돈 벌어서 결혼도 해야 한다며계속 거절을 했지요. IMF가 오지 않았다면 배우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마침 스튜디오의 규모를 줄여야 했고, 누군가는 나가야 했을 때, 가장 막내인 제가 총대를 메기로 했고, 딱 1년만 스스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판단해 보기로 했죠.”그러나 2년 여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초조해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사진작업을 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등에서 그의 장기인 소품제작을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 배우가 되고 난 후의 지진희
지진희는 얼마 전 ‘허준’‘상도’ 등의 히트 드라마를 연출한 MBC 이병훈 PD에게 발탁돼 MBC 창사특집극 ‘대장금’에서 톱스타 이영애(장금역)의 상대역인 민정호 역을 맡게 됐다. 문관 출신의 무관인 민정호는 임금의 주치의 자리에 오르는 장금을 평생 곁에서 지켜보며 보호한다.
50부작이라는 대작에, 또 다른 연기력이 필요한 사극에 첫 도전이라는다소 버거운 도전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여유만만이다.
“98년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의 남자 주인공 오디션을 보러가서 몇 천명 가운데 최종 다섯 명 중의 한 명에 뽑혔어요. 그때 상투를 틀고 사극 분장을 해 봤는데 사극이 나한테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지요.”‘느낌이 좋은 남자’ 지진희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배우는 ‘부드러운남자’의 대명사 안성기. 살며시 미소 짓는 얼굴 속에서, 다르면서도 어찌보면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연기, 재미있어요. 무한히 배워야 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도 부족할 만큼 평생 긴장해야 하는 작업이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새로운 역을 맡을 때마다 내안의 새로운 모습을 끄집어 내고, 그저 발전하는 단계 속의 나를 매일 발견할 뿐이죠.”그렇게 그는 KBS ‘여비서’에서의 포토그래퍼, SBS ‘줄리엣의 남자’에서의 M&A 전문가 승우, MBC ‘네 자매 이야기’에서의 소설가 태석, 한·일 합작 드라마 ‘소나기 비 갠 오후’와 염정아와 함께 출연한 영화 ‘H’에서의 형사 홍대진과 강, MBC ‘러브레터’의 의사 우진 등으로 차근차근 배우로서의 이력을 밟아왔다.
# 한 인간으로서의 지진희
‘대장금’을 위해 승마를 배울 예정이란다. 친하게 지내는 배우 황정민과 탭댄스를 배우고 있기도 하다. 워낙 운동신경이 좋은 데다 모든 스포츠 종목을 좋아한다. 잘 단련된 몸이지만 요즘 민정호의 날렵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다이어트 중이다. 집 앞마당에서 줄넘기를 하거나 한강 고수부지로 나가 농구를 즐긴다. 인라인 스케이트는 요즘 새로 발견한 즐거움.
“힘들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연습을 더 한다”는 그는 고민이생기면 헬기 프라모델이나 비행기 모형 등을 조립하며 근심을 잊는다.
워낙 손재주가 좋아 나무, 쇠, 종이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어 낸다. 전공이 전공이니 만큼 그림 그리기는 그의 장기다. 배우 조승우의 팬미팅때 그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해 그를 감격시켰다.
마침 본사 스튜디오를 찾은 24일은 그의 생일. 인터뷰를 마친 뒤 배우가 되기 전부터 사귀어온 디자이너인 여자친구와 함께 조용히 자축했다. “6년이나 사귀어 왔지만 나를 항상 긴장시키고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유일한 여성”이라는 여자친구는 배우만은 절대 하지 말라며 뜯어말렸지만 지금은 가장 큰 후원자가 됐다.
지난 21일에는 청평에서 40명의 골수팬들과 팬클럽 창단식을 가졌다.
팬클럽의 이름은 그의 탄생화의 이름을 딴 ‘버베나’. 버베나의 은은한허브향처럼, 은근한 그만의 향을 남기고 스튜디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