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진 취재 후기
제작진이 들려주는 방송으로는 못다한 이야기...
 대사관에 불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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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웅 기자,2008-06-05

1. 우리에게는 A 라는 버마인 가이드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는 못한다. 작년 수도 양곤에서의 민주화 시위에 나섰다는 그의 친구, 그 친구는 도망쳤지만 버마 정부는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친구의 임신 9개월된 부인을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했다.

 

카메라에 A의 얼굴을 비춰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버마에 들어가려고 했다. 버마에 살고 있는 버마인의 신분증 사본과 우리를 책임지겠다는 초청장이 있으면 비자가 빨리 나올 수 있다고 했다. A는 우리를 도왔다.

 

버마에 있는 친구에게는 우리가 기자가 아니라 관광객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가서 문제를 일으키면(우리가 기자인 것이 노출되면) 그 친구 인생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당초 A의 역할은 태국에서의 길안내였다. A는 태국 말과 버마 말, 영어를 할 수 있었다. 왜 우리를 돕느냐고 물었다.

A는 먼저, 버마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노출됐을 경우, 자기도, 그 친구도 모른다고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당신들이 기를 쓰고 버마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알기 때문" 이라고 했다. 우리는 버마에 들어가면 몰래, 카메라를 돌려서 많은 화면을 담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해서 버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했다.

 

우리가 귀국하는 날, A는 버마에 있는 그의 친구 역시 우리의 신분을 알고 있다고 고백했다.

 

태국과 버마 국경의 메솥이라는 도시에 갔다. 국경은 녹이 슨 낡은 철 난간이었다. 그 경계를 붙잡고 두 젊은이가 담배를 팔고 있었다. 사이클론으로 얼마나 죽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부 말이 자꾸 바뀐다고 했다. 잘 모른다고 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려 했다. 말을 끊었다. 자기가 잘못 말을 하면 경찰이 때리면서 조사할 거라고 했다. 겁 먹은 그를 달랬다. 정부에 대한 불만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이클론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다.

 

내 주머니에는 서른 개의 1달러짜리 지폐가 있었다. 그가 처할 지 모를 위험은 몇 장의 1달러짜리 지폐로 바꿀 수 있을만한 것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다리 밑에 있는 아이. 난간 아래 장판 위에서 놀고 있는 이 버마 아이는 온종일을 이 곳에서 지낸다고 했다. 밤엔 난간 아래 장판 위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장판 하나를 깔아주고 보이지 않는 엄마는 태국 사람들을 상대로 몸을 판다고 했다. 아이는 때묻은, 짧은 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다.

 

이 곳에 사이클론 피해자도 있었다. 이들은 집을 잃었다고 했다. 옷이 없어서 시체 옷을 벗겨 입었다고 했다. 먹을 것을 찾아 몰래 국경을 넘어 태국까지 도망쳐왔다는 이들은 오는 동안 버마 땅 안에서 다섯 번이나 검문을 당했다고 했다. 검문소가 다섯 개라는 건 다섯 번 지갑을 열어야 했다는 뜻이었다. 이들 역시 카메라에는 얼굴을 보이지 못했다. 버마 정부가 남아있는 가족들을 조사할 거라고 했다.

 

2. A가 준비해준 서류는 완벽해보였다. 새벽 5시에 우리의 여권번호가 선명히 박힌 초청장과, 우리를 초청하는 A의 버마 친구, 얼굴이 뚜렷하게 복사된 신분증 사본을 받았다. 일찍 대사관으로 출발했다.

 

시내 멀리서부터 검은 연기가 보였다. 불은 제법 컸다. 방콕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 일부가 불탔다. 소방차 9대가 왔다. 대사관은 비자 업무를 정지했다.

 

그 날 오후, A는 자기 친구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기로 했다. A가 다니는 대학에 가서 그의 친구들을 기다렸다.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과 비슷했다. 무슨 귀찮은 일을 만들었냐고 A를 힐난하는 듯 했다. 세 명의 버마 젊은이들과 함께 돌 의자에 앉았다.

 

B는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고, C는 검은 안경 안에 눈동자가 컸다. D는 왼 쪽 귀에 구멍을 뚫었다.

 

B는 대사관에 불이 난 건 트릭이라고 했다. 외국인들에게 비자를 주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했다. 당신들의 정부가 멀쩡한 대사관에 비자 업무를 정지시키기 위해 높이가 50미터까지 검은 연기가 치솟도록 일부러 불을 질렀을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C는 버마 정부는 "그럴 만큼 충분히, 교활하다"고 했다.

 

D는 별로 생각이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B와 C는 한 시간까리 테이프가 모두 돌고 난 뒤에도 말을 끊지 않았다. 이들은 많은 말을 나에게 하고 싶어 했다. 구호품이 외국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데도 아이들이 흙 묻은 빵을 구걸해야 하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들이 분노를 토해내는 도구와 같은 거였다. 마이크는 더 이상 소리를 담지 못했지만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C가 가장 목소리를 높인 부분은,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버마 군부는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부자집 아이는 - 그 아이는 군부의 자제이고 - 과외를 해서 지식을 쌓고 , 좀 크면 외국에서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버마의 아이는 - 버마의, 대부분의 아이들... - 먹고 살 방법을 찾기에만 급급해질 것이라 했다. 그래서 버마는 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배울 수 없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 기대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C는 분노가 섞인 탄식을 함께 뱉어냈다.

 

 

비가 한참을 소리내며 내리는 이 날 오후까지, 나는 아직 동남 아시아의 습습한 공기 아래 있는 듯하다. 조그만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나타난, 그저 아시아의 또다른 한 쪽에서 날아온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적은 기대라도, 짧게 가졌을까...

 

마음이 편치 못하다. 최소한, 취재 후기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매거진2580팀 김희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