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그대 그리고 나

S#9. 나물시장 (낮)
옆가게 여자가 나물 푸대들을 끌고 오다가 놀라서 본다. 미숙이 먼저 나와서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탓이다.


옆집            미숙아!
미숙            (말없이 일만 한다)
옆집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은 머리 쥐어뜯고 싸운 후 더 정이 들었다.

옆집            아니, 시골루 살러 간다구 간 애가 왜 도루 왔냐구? (은밀하게) 못 만났구
                나, 그 남자?
미숙            아니, 만났어.
옆집            그런데? 만났는데, 왜 그냥 왔어?
미숙            (옅게 웃는다)
옆집            애 가졌다니까, 뭐라대? 설마 지자식 아니라구 잡아떼지는 않았겠지?
미숙            그새 다른 여자가 생겼더라.
옆집            벼락맞을 인간! 그래서 어떡하구 왔어?
미숙            …언니, 나 돈 놔줄데 좀 알아봐 주라!
옆집            딴소리 하지 말구, 하던 말부터 끝내! 그래서 너 어떡하구 왔냐니까?
미숙            한 돈 천 되는데, 이자는 작게 줘두 확실한데 어디 없을까?
옆집            애 가졌단 말은 해보지두 못 하구 왔구나, 너?
미숙            ….
옆집            아니구 등신!…죽어라, 죽어!
옆집 여자가 더 분하다. 미숙, 더 열심히 무거운 푸대도 들어서 옮기고 마음을 비운 것 같 은 얼굴이다.

옆집            얘가, 팔자가 어떻게 될려구 그러니, 너?
S#10. 바 정도
시연을 앞에 두고 앉아서 깊은 눈빛으로 고백을 하는 영규.


영규            난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말 싫어. 그런데  너하구의 만남은 운명적이란 
                말 빼고는 도저히 설명을 못하겠어….
시연            ?
영규            너를 처음 본 날, 아, 그때의 전율감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져! 넌 담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나를 불렀지. 배낭을 좀 받아 달라구. 순간적이었지만 너
                하구 내 눈이 부딪쳤지…  그때, 정말 이상했었어…  뭔가, 날카로운 섬광 
                같은게 내 심장의 깊은 곳을 팍! 찔러내는 그런 느낌을 받았지. 아마 전기
                충격 같은 그런 거 였을 거야!
시연            ?
영규            집에 와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왜 그랬을까? 그 날카로운 통증은  뭐였
                을까? …나한테는 미스테리였어….
시연            (관심 보인다)
영규            처음엔 네가 이쁜 애라서 그랬나부다 했었어… 그런데 단순히 그것만은 아
                니였어.
시연            ?
영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쌍둥이를 
                만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시연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다, 난?
영규, 시연의 눈을 들여다보며 슬프게 말한다.

영규            시연아… 너하구 같아. 나두 엄마가 둘이야….
시연            (놀라서 본다) ?
영규            다른 건 넌 엄마랑  같이 살지만 난,  낳아준 엄마의 얼굴두  모른다는 거
                야…. (너무나 괴롭다)
시연            정말이니?
영규            그래… 내가 세 살때 헤어졌어.
시연            느 엄마는 어떤 여자였다니?
영규            그 여자… 그 가엾은 여자는 우리집 가정부였대… 말하자면 난 옛날  같으
                면 노비의 자식이야….
그러는 영규 눈이 슬픔을 담은 듯하다.

영규            난 네가 어떤 기분으루 지금까지 살아왔는 지 알아….
시연            (생각해본다)
영규            넌 아마, 늘 너 자신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 같았을 거야….
시연            (그랬어…)
영규            …오라는 말두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파티장에 불쑥 들어선 느낌…모두
                들 웃고 떠들다가 너를 보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거야… 너  혼
                자, 앉을 자리두 못 찾구 어색해 서있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총… 쟤는 
                대체 뭐야? 갑자기 끼어 들어와서 우리의 안락한 행복을 깨뜨리는 저 미운 
                애는 뭐냐?
영규, 시연의 감정변화를 계산해 가며 이야기 한다. 시연, 영규의 계산대로 그 일을 듣고 앉 아있다.

영규            늘 춥구, 뒤통수가 간지럽지, 쟤, 첩자식이래,  쟤 엄마 세컨드래… 등뒤에
                서 느껴지는 손가락질… 수근거림… 축복받지  못하고, 아니, 축복은 커녕 
                누군가의 저주 속에 태어났다는 그 더러운 느낌!
시연            …그만해.
영규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났다는  그 불행감! 한남자의 바람기로  인해 
                생겨난, 아무 가치없는 생명이라는 느낌!  아버지라는 남자를 곤란하게 하
                고 그의 법적 아내를 불행에 빠뜨리고…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너를 괴롭
                히는 것은 네가 친엄마의  일생을 망쳐버렸다는 거야!  나만 아니면, 나만 
                생겨나지 않았으면 저 착하구 가여운 여자를 이렇게 살지않아두 좋았는데, 
                정말 그랬는데! 나 때문에 온통 망가지고 찢겨진 사랑하는 엄마의 일생!!
시연            야! 그만 하라잖아!
시연, 화를 내며 영규를 쏘아본다. 그러다가 탁자에 머리를 묻는다. 영규, 시연의 자리로 건 너가 나란히 앉는다. 손을 잡는다.


영규            …허락해 줘. 너한테 감동을 되찾아주고 싶어, 너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바다를 깨뜨리는 하나의 돌맹이가 되구싶어.
시연, 말없이 얼굴 들고 영규를 본다. 영규가 시연의 손을 잡는다.

시연            (눈물 고인다)
영규, 시연을 한없이 가여워하는 눈으로 바라봐준다. 시연 영규의 어깨에 기댄다. 영규, 절 반은 성공했다는 기분을 시연 얼굴너머로 혼자 느낀다.

S#11. 미숙방 (밤)
미숙을 찾아온 옆가게 여자, 같이 맥주, 땅콩 마시고 있다.


옆집            그 남자한테 알려! 너 혼자 어떻게 키울려구 그래?
미숙            어림없어! 나 혼자 키울 수 있어!
옆집            잔소리 말구 알려! 묘한 게 너 남자들이다! 자기 자식 가졌다면 나갔던 남
                자두 들어온다, 너?
미숙            (희망 느끼나…) 애 핑계대구 거지같이 사정하구 싶지 않아.
옆집            야, 이판에 너 자존심 찾냐? 그런 게 아냐!  진짜 자존심이 뭔줄 알아? 네 
                새끼한테 아빠 찾아 주는 게 자존심인  거야, 야, 괜히 꾸물럭대다가 시간 
                놓치지 말구 빨리 알려! 그 여자하구 더 깊어지기 전에 알리라니까!
미숙, 갈등 느낀다.

옆집            니가 못하면 내가 해줄게. 전화번호 대!
미숙            관둬! 언니!
옆집            그럼 어떡할려구 그래? 정말 너 낳아서 기를래?
미숙            병원앞까지 두 번이나 갔었어, 근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 난 못 해.
옆집            어떻게 기른다는 거야? 너? 응? 처녀몸에 아빠 없는 애 기르기가 쉬울 것 
                같아?
미숙            까짓 거 되는 대루 기르지 뭐!
미숙, 맥주를 든다.

옆집            (빼앗는다) 미숙아, 너 이러지 마!
미숙            언니… 제발 꿈이면 좋겠어… 자다가 꾼 나쁜 꿈이면 좋겠어….
옆집            (가엾게 본다)
미숙            죽어버리구 싶어, 그러면 모든 게 다 깨끗이  해결되잖아. 죽을까봐…나…. 
                (엎드려 운다)
옆집            그러게 내 뭐라던? 연애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구 내가 말했잖아!
미숙            (흐느낀다)
옆집            이 기집애야! 그 새끼 번호 대! 빨리!
S#12. 공중전화
영규가 전화를 하고 있다. 기분좋은 영규.

영규            여보세요? 아, 상옥이냐? 나다,  작은오빠! …나? 잘지내구 있다.  모든 게 
                다 순조롭게 잘나가고 있다! … 집에 별일 없지?… 민규? 아니, 못 만났는
                데?…민규가 왜 서울에 왔어? (하다가 점점 몸이 기울어진다) 뭐? 뭐가 어
                떻다구…?
눈이 번쩍번쩍 위험한 빛을 띄워간다.

영규            (몇 마디 더 듣다가) 이 새끼들을 진짜, 내가…!
S#13. 민규방
상옥이 혼자 전화를 받고 있다.

상옥            제발 모른 척 해, 응?  아부지두 겨우 맘 잡으신 눈치니까  그리구 작은오
                빠, 당분간은 집에 내려올 생각 말아!…  동식이 걔, 진짜 죽을 뻔  했대… 
                아부지는 내가 꽉 잡구 있을테니까, 오빠는 민규나  가끔 들여다 봐! 알았
                지? 올켄지 누군지 그 여자가 민규 밥이나 제대루 먹이는지, 굶기는지, 들
                여다 봐주란 말야!
S#14. 사무실 외경 (낮)
S#15. 자료실
동규, 자료 찾고있는데 수경이 와서 옆에서 일을 한다.


수경            오늘 저녁, 약속있어요?
동규            없어.
수경            그럼 나 맛있는 거 좀 사줘요!
동규            ….
수경            밥 하기 싫어, 오늘 나.
동규            …알았어.
민규 때문에 아직도 기분이 풀어지지 않는 동규이다.

S#16. 사무실
수경, 전화하고 있다.


수경            …민규씨? 나에요, 형수님!! (웃고) 저,  오늘 형이랑 저녁먹구 들어  갈거 
                거든요? 저녁 혼자 해결하시라구요! 할 수 있죠?  그래요, 그럼 이따 만나
                요?

끊는다. 한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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