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충정왕 2년(1350) 2월부터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면서 고려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는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에
실패한 후 원나라는 고려 남해안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부원배세력과 외척세력 사이에 있었던 알력 때문에 고려에서는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고, 고려 조정에 대한 원나라의 불신은 가중되고 있었다. 그런 터에 고려 해안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됨에 따라 원나라는 어린 충정왕을 왕으로 하는 고려
조정에 대해 불안감을 가졌다. 충정왕 2년 9월에 덕녕공주가 원나라에 가는데, 이는 부원배
세력을 물러나게 한 고려 정치상황을 질책하는 원나라의 조치로 해석된다. 이같은 결과를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그간 정치에 많이 간여하였던 공주를 소환하는 조치였다는
것이다.

한편 충정왕이 재위할 때 강릉대군 왕기는 원나라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고려 왕위 계승
자격 요건을 더하였고, 여전히 이제현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데에 덧붙여 원과 밀착된
기씨 일파로부터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또 강릉대군을 따라 원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추종세력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조일신 등은 원나라 내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 강릉대군에게 상당한 정치적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이같은 상황이 계속된 끝에 원나라는 고려의 정치적 난맥상과 국방력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어린 충정왕을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고려 조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대신 원나라는 고려 내에서 신망이 높고,
왕위 계승에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는 등, 여러모로 고려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해 있던 강릉대군 왕기에게 즉위를 통보함으로써 고려 왕을 교체하였다.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를 통보받은 공민왕은 우선 이제현을 섭정승(攝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임명하여 충정왕대에 발호하였던 세력들을 축출하게
하고, 이제현을 중심으로 한 관료집단과 원나라에 있을 때 측근에 있었던 신하들을
주축으로 하여 정치 판도를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정치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한 뒤 공민왕은 1351년 12월에 귀국하여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