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대군 왕기(王祺, 후의 공민왕)는 고려 왕위 계승 경쟁에서 충정왕(忠定王)에게 패하여
귀국이 좌절되고, 그를 지지했던 세력은 정치적으로 거세당하여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형인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뒤 이를 배경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었던 예에 따라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려 하였다. 자신과 조카인 충정왕 모두
고려인 왕비 소생이었으므로 만약 그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다면 충정왕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강릉대군은 왕위 계승 경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충정왕 원년(1349) 10월에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인 노국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노국공주는 당시 황제였던 원나라 순제와
6촌 남매 사이였다. 이로써 그는 원나라 부마(駙馬) 지위를 확보하여 원나라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강릉대군의 장인인 위왕은 황제와 가까운 친척이었지만 원 황실 내에서 위치가
견고하지 않았고,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원나라 공주 출신과 결혼한 고려 왕자들이 원나라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의 딸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고려 왕위 계승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왕권 안정을
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는 강릉대군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는 것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원나라에 오래 머물면서 원나라가 쇠퇴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고려 왕위 계승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을 뿐이었다.
즉위 후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원나라 황실의 도움을 얻겠다는 기대는 애초에 별로
없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