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충혜왕이 퇴위한 뒤 원나라는 당시 8살이었던 충혜왕의 아들 왕흔(王昕)을 왕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이 충목왕이다. 고려의 내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원나라 조정에서는
어린 왕흔(王昕)을 선호하였고, 기황후의 입장도 이와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는
왕이 지나치게 어린 것을 우려하였지만 새 왕이 전왕의 적자이고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대 의사를 밝히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왕기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고려에서는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새 왕을
정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충목왕의 숙부인 왕기와 충목왕의 배다른 동생인 왕저
(뒤의 충정왕)를 후보로 올렸다. 이 표문에는 왕저보다 왕기를 우선하는 입장이 드러나
있었다. 우선 왕기를 앞세워 거론했고, 왕기는 19세, 왕저는 11세임을 밝혀 왕저가 어리다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켰으며, 또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왕을 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
있는데, 당시 고려에서는 왕기가 보다 적합한 왕위 계승자라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기에 이 대목은 고려 왕으로 왕기를 우선 고려해 달라는 의사를 나타낸 것과 같았다.

당시 왕기는 정승 왕후(王煦), 찬성사 이곡(李穀), 판삼사사 이제현, 그리고 과거에 각각 밀직(密直)과 대언(代言)을 역임했던 이승로(李承老)와 윤택(尹澤) 등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왕저는 노책, 최유(崔濡) 등의 부원배, 손수경(孫守卿), 이군해 등 충혜왕의 폐행이면서
덕녕공주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들, 그리고 윤시우(尹時遇) 등 희비 배후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에서 활발하게
로비를 전개하였다. 정치적 식견이나 고려 내에서의 신망에 있어서 왕기 지지세력이 왕저
지지세력보다 훨씬 우월했다. 왕저 지지세력은 역량이 부족하여 보다 원나라에 의존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원나라는 왕저의 즉위를 명하였다. 왕기와 왕저를 지지하는 세력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각기 원나라에서 로비를 벌였는데, 왕저를
지지하는 세력이 원나라 조정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얼마 후 왕기의 추대를
주장한 이들은 충정왕 재위 기간에 정치적 보복을 당하거나 정계에서 한발 물러나게 된다.

또 왕위 계승 경쟁에서 조카들에게 두 번 밀려난 왕기는 그대로 원나라에 머물러 숙위(宿衛, 황제의 시종 및 호위)를 계속하면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