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원나라 왕실 사이의 혼인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는 왕자가 원나라 수도에 들어가서 일정한 기간 동안 숙위(宿衛, 황제의 시종 및 호위)를 담당하였다. 이는 볼모를
들여보낸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대부분의 경우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려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하였다(공민왕의 경우만 혼인과 관계없이 원나라의 요청으로
숙위하였다). 다시 말해서 왕위계승 예정자를 원나라에 보내어 숙위시켜서 원나라 황실
내에서 적당한 배우자를 물색한 뒤 혼인을 통해 원나라 황실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왕권 안정을 도모하려는 고려측의 적극적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는 대부분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딸이었다. 고려 왕실은 황제와 가까운 원나라 황실 사람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고려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누구와 혼인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고려 왕권의 강도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왕실은 원 황실 내에서의 등급으로 놓고 보아도 황제 또는 상위 등급의
종친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원나라 황실에서 종친 왕은 6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고려 왕은 부마왕으로서 1등급이어서 같은 1등급 종친과 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덕녕공주의 아버지인 진서무정왕만 유일하게 4등급으로 격이 많이 떨어지지만,
당시 진서무정왕은 원나라 황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경우였다. 고려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들의 자신감있는 태도는 바로 이같은 출신배경에서
연유한다.

고려 왕실이 원나라의 1등급 종친들과 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고려 왕실이 원나라 내에서 높은 정치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같은 지위를 활용하여 고려 왕은 고려 국내에서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혁을 실시하였고, 충선왕과 같이 원나라
내정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고려가 원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던 까닭에 고려의 정치적 혼란이 원나라에 직접적으로 파급되는 경우도 있어서 원나라는 고려 정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셋째로 원나라 황제보다 항렬이 낮은 사람이 고려 왕의 배우자가 되었다. 결혼으로 인해 고려 왕이 원나라 황제보다 항렬이 높아질 경우 고려와 원나라 왕실 사이의 관계가 어색해지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고려 왕이 원나라 황제보다 항렬상 손윗사람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세조의 딸이었는데, 이들이 결혼하고 난
다음에 황제로 등극한 원나라 성종이 세조의 손자였으므로 제국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가,
충렬왕은 고모부가 되었다.

넷째로 고려 왕실에서도 선왕(先王)의 비였던 원나라 공주보다 항렬이 낮은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같이 양국 왕실의 혼인은 양국의 종실 관계를 충분히 고려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혼인관계에서는 원나라의 강압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려측에서 이를 왕권 강화 등에 정략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더 크다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이 왕권 강화는 원나라를 등에 업은 채 이루어진 것으로, 원나라의 간섭에
따라 고려의 정국이 요동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