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수사물의 원형 <수사반장>
 |
| <수사반장> | |
토막살인에 강간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때론 부패된 시체가 걸어 다니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CSI>나
<덱스터> 같은 미국 드라마의 소재들이 아니다. MBC <수사반장>, KBS <형사 25시>, TBC
<형사> 등 과거 1970~80년대 수사 드라마들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위의 사건들을 태연하게 다뤘다. 이 작품들은
실화에서 소재를 가져오고, 살인과 강간 장면 등을 그대로 방영했다. 죽은 여자가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거리를 떠돌아다닌다는 <형사>의
한 에피소드는 영화 <얼굴 없는 미녀>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당시 수사물은 방송사는 ‘국민계도’를 명분으로 이런 내용을 검열에
걸리지 않고 방영할 수 있었지만, 정작 시청자들에게는 수사드라마가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성인물’이었다. 게다가 이
드라마들은 일주일에 한 번 방영에 로맨스는 거의 배제된 채 수사 과정만으로 에피소드를 채웠으니, 오히려 지금의 수사 드라마들 보다 더 미국 수사
드라마의 그것과 비슷한 스타일을 가졌었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수사반장>은 실제 경찰의 지원을 받아 소재는 물론 수사 과정과 증인
심문 방법까지 자문을 받아 리얼리티에 매우 충실했고, 수사반장 최불암을 중심으로 수사 관할구역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자며 반장에게 대들기도 하는
고참 형사(김상순), 힘깨나 쓰면서 가끔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형사(조경환), 그리고 막내(남성훈) 등으로 이뤄진 다채로운 캐릭터
구성 등으로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줬다. 또 <형사 25시>는 여기에 진범이 교묘한 속임수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이를 알게 된 형사가 범인을 추궁하지만, 범인이 자신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처벌받지 않을 거라며 웃는 것으로 끝나는 에피소드를 방영하는
등 추리물의 요소를 강화하기도 했다.
형사물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소재 고갈과 모방범죄에 대한 우려로 <수사반장>이 종영된 뒤, 한국의 수사 드라마는 <수사반장>의 영광을 결코
재현하지 못했다. <수사반장>의 뒤를 이어 두 남자 형사를 주인공으로 좀 더 캐릭터를 강화한 MBC <두 형사>가
방영됐지만 <수사반장>이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온갖 소재를 다 쓴 탓에 캐릭터만 바뀐 또 다른 <수사반장>에 머무르고
말았다. 특히 1990년대는 ‘X세대’로 통칭되던 신세대가 대중문화의 주 소비계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방송사가 본격적으로 미니시리즈에 역량을
쏟아 부으면서 비교적 저렴한 제작비로 1주일에 한번씩 방영하는 수사 드라마는 방송사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당시 시청자들은 중년 배우들이 매주
비슷비슷한 스토리로 범인을 검거하는 수사 드라마 대신 SBS <모래시계>처럼 스케일 큰 시대극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재조명하거나,
MBC <질투>와 KBS <느낌> 등 젊은이들의 연애를 다루는 트렌디드라마에 열광했다.
 |
| <경찰특공대> | |
 |
| <좋은
사람> | |
그래서 1990년대 이후의 수사 드라마는 <수사반장>류의 전문적인 수사 드라마보다는 수사 드라마를 미니시리즈에서 트렌디드라마의
형식과 접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곤 했다. KBS <폴리스>, SBS <고스트>, SBS <경찰특공대>, MBC
<좋은 사람>은 마치 트렌디 드라마와 수사 드라마, 그리고 할리우드식 액션 영화를 1/3씩 섞은 것 같았다. 이들 작품에는 모두
트렌디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완벽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지만 개인적인 아픔을 가진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졌고, 작품 초반에는 꼭 그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스케일이 큰 액션이 등장했으며, 적들은 경찰이 막기 버거울 정도로 강력한 악의 세력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오히려
어느 쪽의 장점도 살리지 못한 채 모두 실패했다. <수사반장>만 해도 1970년대에는 형사들이 모두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수사를
하고, 바에서 데이트를 했지만 1980년대에는 허름한 잠바를 입고 활동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만큼 대중에게 경찰, 혹은 형사의 이미지가
‘고생하는 또 다른 서민’으로 바뀐 상황에서 멋진 자가용을 몰며 무슨 일이든 척척 하는 고급 전문직 같은 형사는 쉽게 와닿지 않았으며, 마피아나
정재계의 실력자가 얽힌 적의 존재는 시청자들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나마 형사들 내부의 생활을 다룬 <좋은 사람>은 ‘한국
경찰’ 같았지만, 총기 소지 자체가 불법인 한국에서 마치 홍콩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총을 난사하는 <경찰 특공대>나
<폴리스> 속의 경찰은 어느 가상국가의 경찰들처럼 느껴졌다. 또 <고스트>는 세기말의 흐름을 타고 형사를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악마가 등장하는 오컬트적인 요소까지 더했지만, 같은 해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와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부실한 특수효과와
허술한 설정 등으로 인해 실패했고, 6년 뒤 <구미호 외전>은 <고스트>의 문제를 그대로 반복하며 또 다시 실패했다.
<수사반장>의 맥이 끊기면서 한국 수사 드라마는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지 못한 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특수효과),
트렌디드라마(애정구도), 홍콩 느와르(액션과 갱들의 등장)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SBS 시트콤 <형사>처럼 아예 기존 형사의
설정을 뒤집어 맞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좀스럽고 구차한 형사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확실한 풍자와 본격 형사 드라마의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수사반장>의 영광을 오늘에 재현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수사반장>에서 시작된 전문 수사 드라마의 특징들을 이어받거나, 현재 수사 드라마에 영향을 준 작품들은 오히려 드라마 바깥에
있었다. 형사들이 갖은 고생 끝에 실제 생활 속의 범죄자를 잡는 <수사반장>의 스타일은 MBC <경찰청 사람들> 같은 재연
프로그램으로, 추리의 요소는 법정 재연 프로그램 MBC <실화극장 죄와 벌>을 통해 이어졌다. 또 <폴리스>의 원작이 된
동명의 작품을 그린 만화가 이현세는 <폴리스> 시리즈를 낸 것에 이어 하드보일드 액션과 스릴러를 결합한 <블루 엔젤> 등을
통해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보다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범죄들을 다루며 소재를 확장했다. 특히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수사 영화들은 지금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경찰, 혹은 형사의 캐릭터를 완성했다.
<투캅스>는 ‘적당히’ 부패한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더 이상 정의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세속적인 ‘생계형’ 형사 캐릭터를
등장시켰고, 때로는 용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증언을 얻어내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수사팀은 남성들로 가득 찬 한국
형사들만의 문화를 보여줬다. 그리고 서랍 속엔 볼펜 한 자루가 전부에 어지간한 범죄자들은 일단 패고 시작하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설경구)은 일반 시민만도 못한, 조폭에게는 또 하나의 조폭이 될 수 있는 ‘3D 업종 노동자’로서의 형사를 등장시켰다.
한국형 형사의 확립
한국 영화 속 서민 남자 형사의 캐릭터는 수사 드라마가 아닐지라도 형사가 등장하는 드라마 속 형사 묘사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줬다.
형사로서는 충실하지만 가정사에는 무관심한 KBS <투명인간 최장수>의 최장수(유오성), 늘 아슬아슬한 위험 속에서 사는 MBC
<눈사람>의 필승(조재현)은 강철중보다는 부드러웠지만 늘 문제를 안고 사는 중년 형사라는 점에서 비슷했고, SBS <프라하의
연인>에서 남자들로 가득 찬 강력반 형사들의 끈끈한 우정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연상시킨다. <프라하의 연인>과
<투명인간 최장수>의 첫 회에 형사 한 명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조폭과 맞서는 모습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첫
시퀀스와도 비슷하다. 이런 형사 캐릭터를 통해 한국의 수사 드라마는 다시 보다 한국의 현실에 걸맞는 캐릭터를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
| <달콤한
스파이> | |
 |
| <부활> | |
이런 형사 캐릭터의 변신은 최근 수사 드라마의 경향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MBC <달콤한 스파이>에서 사건보다도 회식에만
관심이 있거나, 무조건 주먹부터 나가는 형사 캐릭터에 대한 묘사나 KBS <도망자 이두용>에서 가정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정을
저지른 부패 형사에 대한 묘사 등은 작품의 분위기를 보다 코믹하게 하거나, 혹은 의외의 반전을 만들어내는 장치 역할을 하면서 수사 드라마의 폭을
넓혔다. 또한 KBS <부활>은 수사 드라마의 형식 안에 수많은 복선 등을 깔고 시청자들과 두뇌 싸움을 벌여 기존의 한국 수사
드라마와는 또 다른, 추리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을 만들어 호응을 얻었으며, 이런 흐름은 같은 제작진의 KBS <마왕>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형사 캐릭터들이 보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형사 캐릭터에 밀착되거나 과거의 추리물의 형식에 가깝다면, MBC <추리 다큐
별순검>과 KBS <특수수사일지 : 1호관 사건>은 <CSI> 등장 이후 달라진 한국 수사 드라마의 또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CSI>를 연상시키는 치밀한 과학수사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CSI>의 스타일을 어떻게 한국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두 작품은 마니아들의 호응을 얻었으되 <추리다큐 별순검>이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폐지됐고,
KBS <특수수사일지 : 1호관 사건>는 4부작 특별 편성되는 등 이런 과학수사 중심의 수사 드라마는 아직 큰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땀냄새 나는 한국형 형사물
 |
| <히트> | |
 |
| <다모> | |
전문적인 장르 드라마의 특성을 살려 시청자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면서도 어떻게 한국적인 접점을 찾느냐가가 현재 한국 수사 드라마의 과제인
셈이다. 그 점에서 형사들의 캐릭터를 중심에 내세우고, 거기에 할리우드 수사 영화를 연상시키는 카레이스와 총격전 등의 볼거리를 더한
<히트>나, 수사 드라마에 시대극적인 요소와 강한 멜로라인을 성공적으로 이식한 <다모>는 한국식 수사 드라마의 또 다른
방향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수사 드라마는 어쩌면 바로 지금 한국식 수사 드라마의 전통을 새롭게 세우고 있는 시기일는지도 모르다.
1970년대 <수사반장>에서 멋진 양복차림으로 탐문수사를 벌이던 탤런트 조경환은 이제<히트>에서 경찰청장을 연기한다. 그
시간 동안 돌고 돌아, TV 속 한국의 수사관들은 다시 조금씩 대중에게 ‘땀냄새 나는 한국 형사’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글) 강명석 ( 기획위원)
(매거진t 블로그) 서교동 t 팩토리 바로가기 (http://blog.naver.com/magazinet)
저작권자 ⓒ 매거진t.(www.magazinet.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2007-04-06
(2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