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아산 직원들은 무전기를 들고, 대규모 출정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250여명의 개성출신 실향민들의 소풍가는 아이마냥 웅성거렸습니다. 약간의 긴장감마저 감돌았습니다.
밤사이 내린 비 탓인지 도로엔
안개가 내려앉았습니다. 뿌연 안개를 뚫고 15대의 버스가 나란히 나란히 북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는 15대, 이 중 1대는 예비 버스라서
실제로는 14대가 움직였습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개성까지 대략 70km에 불과하지만, 남측과 북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3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남측 출입사무소인 도라산 CIQ 신관건물이 공사중이었습니다. 북측 출입사무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북측
군인이 버스에 올라타 인원을 점검합니다.
현대아산의 노대환 대리는 “예전에는 인원을 일일이 세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요즘은
노하우가 생겼는지 빈자리만 세서 금방 끝난다”고 귀띔해줬습니다. 관광단은 250명씩 고려와 박연, 두 팀으로 나눠서 움직였습니다.
개성시내를 둘러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5백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기엔 개성은 아담한
도시였습니다.
고려팀은 오전 개성시내, 오후 박연폭포, 박연팀은 박연폭포를 둘러본뒤 오후에 개성시내를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이번에는
고려박물관(옛 성균관), 선죽교, 숭양서원이 포함됐습니다. 주요 관광지가 시내 중심가에 있어서 이동시간은 10여 분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거리는 마치 시대극 세트장처럼 아담하고 옛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파란 아파트 창틀과 유리창에서 새로 단장한 듯한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엄마 손을 잡고 가는 반바지 차림의 유치원생, 호기심어린 눈으로 창밖을
훔쳐보는 아이들, 개성시민의 소소한 일상을 엿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렌즈에 담고픈 욕심을 누그러뜨려야 했습니다.
북측은 이번
취재에 있어 취재진은 물론, 일반 관광객도 개성 시내 모습을 촬영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진 찍는 것을 발견하면 당장 그 버스를 돌려보내겠다는
경고가 있었고, 실제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것을 발각당한 취재진이 그 자리에서 사진을 삭제해야했습니다.
관광지 입구마다 간이 기념품
판매대가 설치돼 있고, 매대마다 빨강, 초록 유니폼을 갖춰 입은 판매원들이 개성 특산품을 팔았습니다. 개성을 개방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55년 만에 맛보는 건데...” 올해 98살, 송한덕 할아버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연신
우물거리면서 입안에 들어찬 고향의 맛을 오감으로 즐기시는 듯합니다. 북측 땅을 밟았다는 긴장감 탓인지 내내 굳은 표정으로 있었던 일부 관광객
조차, 개성음식을 맛보며 스르르 풀어져 내린 모양이었습니다.
이번 관광의 백미는 박연폭포. 이제까지 남측 취재진에게 제대로 위용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개성시내에서는 24km, 40여분을 가면 천마산 기슭에 자리한 송도 삼절, 박연폭포와 조우할수 있습니다. 전날까지 쏟아
부은 비 덕분인지 박연폭포는 세찬 풍광을 보여줬습니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솔향이 배여났습니다. 북측안내원인 문광철 씨에 따르면, 이 지역은
크낙새 보호지역이라고 합니다. (북측 표현으로는 클낙새라고 한다더군요.)
개성은 광복이후 38선 이남으로 남측에 속했던
지역입니다. 송도상인의 후예로 상업이 발달했던 도시인터라, 한국전쟁이후 북측에서는 주민들을 대거 타지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전략적으로 서울에서
멀지 않은 요충지인데다, 상업도시로써의 자본주의 색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고 할까요.
학자들은 대략 40~50%의 주민들이
타지로 이주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개성 실향민들은 이산가족을 찾을때도 쉽지 않다고 토로하곤 합니다. 실향민들은 고향땅을
밟았다며 기뻐하다가도, 두고온 식구들 안부부터 알아야하는데. 한숨을 흘렸습니다.
떠나기 전날 개성시민회
사무실에서 만났던 할머니 가운데 한 분을 돌아오는 길에 도라산 CIQ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 손을 꼭 잡으시더니,
남대문(개성)을 드디어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마침, 남대문 근처에 ‘통일려관’에서 식사를 한터라 식사를 마치고 담장에 붙어서
폴짝폴짝 뛰었다는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담장너머로 집 근처 풍경을 봤다는 겁니다.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할머니는 1972년
남북회담 당시 호외로 뿌렸던 신문의 개성 시내 사진을 오려서 30여 년을 내내 지갑 속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몇 분은 돌아서는 발걸음이
개운치 않은지,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새벽 6시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5시 반쯤 남측 CIQ를 통과해 빡빡한
하루일정을 마쳤습니다. 서울에서 2시간 거리, 개성까지 오는데 55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개성 깍쟁이 판매원과 나눈 실랑이에서 안내원과
주고받은 농담에서, 손을 흔드는 개성 시민들의 모습에서 한발, 또 한발 더디지만 좀 더 가까워진 개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