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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ending parady 글 | 오명근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을 밤새도록 사랑하고 싶어 

그건,가슴 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 짐 모리슨 ‘The end’ 중에서 

 

  명륜동 성대 앞에 가면 ‘도어즈’란 술집이 있다. 먼저 낡고 눅눅한 목조향이 코끝을 자극하고, 좁은 다락방은 뿌연 담배 연기로 눈이 따끔거린다. 흐린 조명 아래 벽을 더듬다보면 샤먼처럼 눈을 부릅뜬 짐 모리슨과 마주친다.  

  오랜만에 보는 턴테이블에서는 엘피 레코드가 돌아가고, 사람들은 옛날 노래에 맞춰 몸을 뒤척이며 떠든다. 결코 1차로 찾아갈 집이 못된다. 2차, 3차에서 몽환에 빠질 만큼 술을 마시고 찾아가야 제격인 집이다. 어차피 멀쩡한 정신으로는 찾을 수 없는 집이다. 아무리 골목 귀퉁이에 숨어있어도 술로 넋을 놓고서야 찾을 수 있는 집이다.  

  이처럼 도어즈의 음악은 멀쩡한 정신이 아닌, 몽환에 빠지고 넋을 놓고 들어야 하는 싸이키델릭락이다. 마약을 하고 들으면 금상첨화이겠으나 그게 쉽지 않으니 술로써 정신을 축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젊은 시절 한때의 감상이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죽어야 한다. 세월 탓을 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질질 짜면서 아등바등하고,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다고 혀를 끌끌 차기 전에 죽어야 한다. 흔히 히피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히피의 락이 싸이키델릭이다. 아메리카가 재수가 없어진 시대에 살면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다면 1960년대 낙원을 꿈꾸던 히피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메리카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가 지나고 쿠바를 괴롭히던 케네디가 암살되자 괜히 슬픈 척한다. 그 틈을 비집고 대서양을 건너 가장 친한 친구인 척하고 찾아온 비틀즈에게 잠시 위안을 받는다. 밥 딜런도 통기타를 들고 잠시 상처를 위로하지만, 인종차별, 흑인 폭동, 킹 목사의 암살, 심지어 베트남 해방전쟁에 개입해 훼방꾼 노릇이나 하는 나이 서른이 넘은 세대에 환멸을 느낀 아이들은 기어이 멀쩡한 집을 나와 거리의 히피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보다 자극적인 음악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이 싸이키델릭이다.  

  환멸을 느낀 아이들이 의식을 가지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아나키스트가 된다. 그 당시 아메리카는 아나키스트가 우세했고, 그들을 히피족이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군인만 대통령을 하고, 학생들을 군인처럼 가르치던 나이 서른이 넘은 세대에 환멸을 느낀 아이들이 1980년대에 멀쩡한 집을 나와 거리의 투사가 된다. 아메리카와는 달리 사회주의자가 우세했고, 그들은 겉으로는 사물놀이를 즐긴다지만 대체로 밥 딜런류의 포크락을 즐긴다. 그 시대의 흐름에 눌려 일부 사회주의자의 가면을 쓴 아나키스트들은 도어즈의 보컬 짐 모리슨을 이야기하고,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즈를 이야기하는데, 그 부류가 만만치 않다. 어쨌거나 포크락이든, 짐 모리슨이든 가수를 딴따라로 천대하는 아이들이 아메리카를 재수 없어 하면서도 그들의 음악을 즐기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장정일의 관능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보면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이 ‘성스러운 3J’로 등장한다. 마약을 하고,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죽은 히피들이어서 성스러운 것인지, 예수처럼 교주라서 성스러운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그보다 기타의 전설이라는 지미 헨드릭스를 제치고, 최고의 백인 여성 블루스 싱어로 회자되는 제니스 조플린을 제치고 짐 모리슨이 제일 낫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유인 즉, 지미 헨드릭스는 흑인이고, 제니스!  조플린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이고, 짐 모리슨은 잘생긴 백인이란다.  

  유독 영화감독들이 그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팀 버튼이 그렇고, 프란시스 코플라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베트남전 당시의 아메리카를 짐 모리슨이라는 코드로 읽고 있다. 아예 올리버 스톤은 그의 사망 20주기 기념으로 ‘도어즈’란 영화를 바친다. 짐 모리슨 역의 발 킬머가 열창하는 ‘Light my fire’가 인상적이다.  

  한술 더 떠서 한국에 유독 펜이 많은 하루끼는 ‘짐 모리슨을 위한 소울키친’이란 글에서 짐 모리슨은 전설 따위가 아닌,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더 가관인 건, 불문학 교수이자 랭보 전문가라는 월리스 파울리라는 작자는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이라는 책에서 그를 랭보와 같은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참으로 쓸데없는 연구를 다 했는데, 가만히 보면 그와의 인연을 은근히 과시하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그가 자신한테 감사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단다. 당시 그는 랭보를 이야기하고, 니체를 이야기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히피라면, 의식을 가지고 아나키스트가 된 히피라면 누구나 랭보를, 니체를 이야기할 수 있다. 

  히피들의 특징이겠으나 짐 모리슨 역시 말이 많은 편이다. 그의 세 치 혀끝에서 ‘더 도어즈(The doors)’가 탄생한다. 도어즈를 설명하기 위해 구구절절한 말들이 이어진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면서 ‘인식의 문들이 깨끗이 청소된다면 모든 것들이 무한히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라고. 그도 모자라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알려진 사실과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 사이에 문들이 있다고. 여기에 그의 동료인 레이 만자렉이 현혹된다. 레이는 결국 음악성이 검증되지 않은 짐을 자신의 밴드로 끌어들인다. 사실 그 당시 히피들이 좋아하던 올더스 헉슬리의 시집 제목인 ‘인식의 문(Perception of the doors)’에서 빌려왔다고 설명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레이와 그의 동료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마약을 하고 횡설수설하는 짐의 입을 따라 연주하느라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히피들의 우상이었던 짐 모리슨은 인식의 문을 찾았을까? 1967년 히피들은 인식의 문을 열고자 샌프란시스코에서 축제를 벌인다. 하지만 히피들의 축제였던 ‘Summer of love’는 아쉽게도 나이 서른이 넘은 세대의 저항에 부딪쳐 빛을 잃는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그래야 쫓아낼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인식의 문의 오픈은 가장 아메리카다운 장사치들의 상술에 의해 그 계기가 마련된다. 5만 명만 모여도 대박이라고 여기고 1969년 8월 15일 뉴욕 근교의 우드스탁에 락 페스티벌을 열었는데, 무려 40만, 어쩌면 100만의 히피들이 모였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마약과 사랑, 음악이 뒤엉킨 히피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여기서 짐 모리슨은 인식의 문을 보았을까? 흥분한 지미 헨드릭스는 아메리카의 노래를 조롱하듯 부르며 이빨로 기타를 물어뜯고, 제니스 조플린은 비를 흠뻑 맞으며 목이 터져라 열창해서 히피들의 갈채를 받는다. 다만 짐 모리슨만이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마이애미에서의 외설 파동으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여서인지, 그 거대한 전율의 세계에 움츠려들어서인지 샤먼의 광기를 드러내지 못한다. 중요한 건,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어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메리카의 원래 주인인 죽은 인디언들의 저주이다. 나이 서른을 넘겨서는 안되고, 행운의 숫자 7이라는 주술에 이끌려 지미 헨드릭스가 먼저 죽고, 제니스 조플린도 뒤따라 죽는다. 향년 27세 졸. 

  말 많은 히피들의 우상 짐 모리슨. 죽은 인디언의 혼백이 따라다닌다고 떠들던 짐 모리슨. 꼭 귀신들린 샤먼처럼 이야기한다. 사실 목소리만으로 샤먼을 찾는다면 제니스 조플린만한 히피가 없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특히 ‘Summertime’은 오프닝으로 나오는 상큼한 클래식의 음향들이 영매를 부르는 샤먼의 주술에 이내 질식한다. 어쨌거나 짐 모리슨은 무엇인가 눈치를 채고 죽은 인디언의 저주를 피해 애인 파멜라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달아난다. 그러나 끝내 저주의 주문을 해독하지 못하고 죽는다.  

  역시 향년 27세 졸. 떠도는 풍문에는 죽음을 가장해 다시 남미로 달아났다는 설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파리든, 남미든 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죽은 인디언의 혼백으로 샤먼이 되었다면 그 끝은 순록이 뛰노는 더 넓은 시베리아가 되어야 한다. 그곳이 바로 죽은 인디언들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 모리슨은 아메리카에 없고, 시베리아에 있어. 왜냐면? 짐의 친구들이 그를 아메리카로 데려가기 한발 앞서 파리에 묻은 건 파멜라인데, 그녀가 그 이후 종적을 감춘 거야. 짐의 추종자들이 그 이유를 캐러 다시 파멜라를 찾았을 땐 이미 그녀는 죽은 뒤였어. 다시 말해 그때 짐과 함께 있었던 건, 파멜라가 아닌 죽은 인디언의 혼백이었던 거야.” 

  참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오랜 시간 듣는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서도 죽지 못한 늙은 아나키스트의 이야기를, 마약 한번 못해보고 사회주의자의 가면을 쓴 비겁한 아나키스트의 이야기를 아주 오랜 시간 듣는다. 아메리카가 이라크를 괴롭히는데 왜 인식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고, 왜 죽은 인디언의 혼백은 침묵하는지 분개하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질질 짜면서.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 술집 ‘도어즈’에 앉아 마약 대신 술로 정신을 축내면서 ‘the end’를 듣는다. 아나키스트의 구차한 변명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