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에게 주파수를 맞춰 봐!
글
| 강소영
대부분의 동물에게는 일과 놀이의 구분이 따로 없다.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고, 이외의 시간은 잠과 배설과 한가로운 무위로 채워지는 것이 이른바 동물의 삶이다. 번식을 하거나 터를 찾는 일도 본능에 의해 그런 시간 속에 뭉뚱그려져 있을 뿐, 시기는 있어도 시간에 따르는 구분과 제약이 없는, 이른바 자연의 삶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하루는 24시간이며 일 년은 열두 달이라는 정확한 시간의 개념 아래 일상을 통제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일상의 대부분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일로 채워져 있다. 인공의 세계를 짓고 사는 사람의 숙명이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일과 구분되는 놀이 문화가 필수적이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의 노고를 위안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선과 같은 일상에 칠하는 윤활유. 따라서 사람들이 놀이에 젖어들 때, 익숙한 각자의 생활 반경에서 될 수 있는 한 멀어지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그것이 음주가무든 산이나 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든, 사람에게 있어 놀이란 억눌러 둔 자연에의 회귀 본능을 만족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일탈을 꿈꾸며, 이곳이 아닌 저곳,자연의 삶에서 맛볼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자유를 향한 갈망이 크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자연의 영역이 있다. 지상에서의 삶을 허락 받은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늘을 날 수는 없는 일. 그 하늘을 날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이 비행기라는 기계를 만들어 냈다 해도, 사람에게 하늘은 여전히 여정(旅程)으로만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먹이를 하늘에서 구하는 새는 없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하늘은 날개 달린 새들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 새들 가운데서도 마치 땅 위를 뱅뱅 도는 사람의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생의 태반을 하늘에서 보내는 새가 있다.
바로,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불리는 알바트로스(albatross)다.
알바트로스는 이름이 주는 신비한 어감과 달리 지구상에 실존하는 새다. 몸길이 90cm, 펼친 날개 길이가 2~3m에 이르는 이 커다란 새는 먼바다에서 주로 생활하므로 땅 위에서는 쉽사리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서식지 역시 대양 한가운데 몇몇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어, 간혹 바다 위에서 날개를 펴고 비행하는 알바트로스를 본 예전 뱃사람들이 그 신비한 모습에 매료되어 ‘바다에서 죽은 선원들의 영혼이 환생한 새’라고 믿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바다 한가운데 둥지를 틀고 사는 이 새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대륙 멀리까지 날아가기도 하는데, 90일만에 24,843마일을 날아가는 놀라운 기록으로 오늘날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자유의 상징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 세계의 주인으로 비유되곤 하는 알바트로스. 자유자재로 하늘을 나는 이 새에게 붙여진 온갖 영예로운 수식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지상에서 보여 주는 알바트로스만의 독특한 행태다. 그 또한 한번에 쉬지 않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는 새만이 가지고 있는 숙명일까. 알바트로스는 고통 없이는 지상에 내려앉을 수 없다.
하늘에서의 위용을 자랑하던 모습은 간 데 없이, 알바트로스는 지상에 착륙하는 순간의 불안정한 자세 때문에 머리나 부리를 땅에 부딪치기도 하고 그로 인해 때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는 답답함을 자아낼 정도로 동작이 둔해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도움닫기 없이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 한마디로 알바트로스는 땅 위에서는 저주받은 새인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가 지상에서의 알바트로스를 ‘현실에서 낙오되고 비웃음을 당하는 시인의 운명’에 비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늘에서의 삶을 허락 받은 알바트로스에게 지상은 그 자체가 불리한 조건이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대범함으로 쉽게 사람 손에 잡히는 것 역시 지상에서의 알바트로스의 운명이다. 그래서 알바트로스의 삶은 안데스 산맥의 높은 하늘을 날며 단 한번의 날갯짓으로 4천 미터 아래에 있는 먹이를 낚아채는 콘도르(condor)라는 새와도 비교된다.
콘도르 역시 알바트로스와 마찬가지로 땅으로 내려앉지 않고 오래 하늘을 날며, 비행 중에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나 날렵한 동작으로 착륙과 이륙이 자유로우며, 높은 하늘만을 날기 때문에 어떤 짐승이나 사람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지 않는다. 바꿔 말해 콘도르에게 있어 지상은 먹이를 얻는 사냥터에 불과하며, 알바트로스처럼 숙명이라고 말해도 좋을 지상에서의 어떠한 불리한 조건도 갖고 있지 않다. 콘도르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상을 찾아야 하는 새가 아닌 점에서 알바트로스와 구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바트로스는 아무리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왜 굳이 먼 길을 날아 땅 위로 내려앉는 것일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어디 시인만의 운명일까. 어차피 사람은 현실이라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이상을 좇아 날아오르는 꿈을 꾸는 존재다. 이상의 세계에서 불안전한 현실로 먼바다 위를 날아오는 알바트로스처럼, 그래서 사람과 알바트로스는 전혀 다르면서도 또한 서로 닮아 있다. 이 곳 아닌 저 곳,허락된 영역을 벗어나 다른 세계를 꿈꾸는 존재. 알바트로스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땅 위에 내려앉듯, 사람 역시 때로 위험을 향해 돌진하는 무모함으로 이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루의 인디오들에게 신성시되고 있는 콘도르보다, 오히려 알바트로스가 더 아름답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살면서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사람 역시,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