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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나타샤는 누구인가 ?
백석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참 많네요. 왜 좋으냐고 물으면, 그냥 시가 좋다고들 말하지요. 어떤 시가 좋으냐고 물으면, 나타샤를 꼽는 사람들이 많아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 하네요. 그래도 김소월도 있고, 정지용도 있는데, 왜 좋으냐고 물으면, 요즘 말로 얼짱이라네요. 빛 바랜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얼굴이군요. 그래서 그게 다냐고 또 물었지요. 그랬더니 애잔한 로맨스를 이야기하네요.
오늘의 백석을 만든 건, 시인 이동순과 백석에게 나타샤로
불렸던 자야 여사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어떤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신비에
쌓인 순수 서정 시인의 발굴과 화려한 로맨스의 부활. 목적이야 다르든,
같든 두 사람의 공감대는 시류에 딱 들어맞았지요.
80년대 후반 두 사람은 백석의 시와 로맨스를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야말로 봇물이 터졌다고나 할까요. 금광에서
노다지가 터지듯 온통 호들갑을 떨었지요. 시기가 좋았습니다. 북쪽
문인들에 대한 해금과 맞물려 서정시와 로맨스라는 주제는 사람들의 찌든 감성에 자극제로서 충분했지요.
이제 백석은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석을 연구하기 위해 앞다투었지요. 향토색 짙은 모더니즘을
극찬하고, 평안도 방언의 애용은 모국어 고수라는 측면에서 일제 강점기의 문화적 저항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심지어 ‘남 정지용, 북 백석’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세계 최고의 시인이라는 찬사까지 보태어졌지요.
심지어 ‘백석 전문가’가 다 생겨나
송준이란 사람은 일본을 날아다니고, 중국을 날아다닌
끝에 백석의 생사를 1963년에서 1995년으로 연장시키고, 말년의 모습이 담긴 사진까지 구해왔습니다. 사진을 보니, 참 곱게도 늙었네요. 근데, 백석이
맞긴 맞나요?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초라한 몰골이 가슴을 아리게 한답니다.
어디 그뿐이겠어요. 백석의 나타샤 자야는 백석의 이름으로 문학상마저 만들지요. 그 이름하야
‘백석문학상’. 근데, 자야는 참 돈도 많았네요. 1천 억대의 자산가라니. 길상사에 헌납하고, 카이스트에 기부하고, 고인이 된 이후 상속에 얽힌 사소한 송사에
휩쓸리기도 했지요.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다만 재미있는 건, 북쪽 사람들은 백석을 잘 모른다는 거지요. 시인 도종환이 2001년‘8.15 민족통일대축전’ 때 방북하고 와서 한 말입니다. 북한 평론가를 만나 정지용에 대해 물으니, 전쟁 당시 평양으로 이송
도중 미군 폭격으로 죽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면서도 백석에 대해서는 이름도 모르더랍니다. 북한 문학사를
공부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백석이란 이름은 1995년에
나온 ‘조선문학사2’에 ‘여승’, ‘비’, ‘모닥불’이 소개되면서 잠깐 나와요. 그나마도 추측인데, 남쪽에서 하도 백석, 백석하니까 겨우 찾아서 넣은 흔적이 다분해요. 근데,
재미있는 사건이 생겼어요. 분명 자야는 회고록에서 나타샤는 자신이라고 밝혔는데, 소설가 최정희의 가족들은(그들 역시 소설가네요. 소설가 김채원, 소설가 김지원) 나타샤는 백석이 최정희한테 실연 당한 이후에 보낸 연시라며 백석의 육필 원고를 공개했어요.
또 한 사람,
많지도 않은 백석의 시를 찬찬히 살펴보면 일관되게 나오는 여인이 있어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千姬라는, 통영 명정골 ‘객주집의 어린 딸 蘭’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난이라는 여인의 실체가 밝혀진 게지요. 백석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잔등’의 소설가 허준의 결혼축하 모임에서 역시 같은 친구인 신현중이 이 여인을 백석에게 소개시켜 주었답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한 마디로 필이 꽂힌 거지요. 마침내 백석은
오랜 연모 끝에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그녀네 집에다 청혼을 하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합니다. 그보다 실연의 상처가 더 아린 건 얼마 뒤 그녀를 소개시켜 준 신현중이 그녀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지요.
하지만 웃긴 건 이즈음 백석은 서너 차례 결혼하고
파혼한 것으로 되어있어요. 그러면서도 자야와 동거를 하고 난과 최정희에게 연정을 품었다니, 이를 두고 누군가는 파렴치한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어쨌거나 도대체 백석의 나타샤는 누구일까요? 일단 백석이 살았던 당대의 시대로 되돌아가 사실을 확인해봐야겠어요.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비가 내린다. 캄캄한 비속에 새빨간 달이 뜨고, 하얀 꽃이 피고, 먼발치에서 개가 짖자 백석은 문득 김 냄새나는
비가 내리던 바닷가가 생각난다. 그리고 홀어미와 사는 물새 같은 외딸이 아지랑이같이 떠오른다. 아, 이런 날은 바닷가에 가고 싶다. 그때였다. 순사에게라도 쫓기듯 헐레벌떡 허준이 백석의 자취방으로 쳐들어온 건.
“주니, 어찌
그럼메?”(백석은 허준을 ‘주니’라고 부른다.)
“도리, 도리! 그게 말이야.”(도리, 도리는 도리도리 짝짝꿍이 아니라, 백석의 이름 돌 석자에서 뜻 이름
돌을 가지고 부르는 호칭이다.)
“노천명, 모윤숙이 자네의 시 나타샤를 가지고 낄낄대며 구경하지 뭐야.”
“무시기!”
“자네가 최정희를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야? 걔들이 자네가 보낸
편지도 보여주던 걸.”
“이런 싸가지 없는 에메나이들!”
백석은 너무 창피해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좋은 얘기라고 이 밤에 부랴부랴 달려온 허준이
야속타. 무슨 자랑거리라고 연애편지를 지 친구들한테 보여줘서 사람을 요렇게 꼴사납게 만드는지 정희가
더 야속타.
“정희는 안돼.
임자가 따로 있어. 북청 물장수 꺼야.”
“이런 종간나새끼! 북청 물장수가 뉘기야?”
“그것도 몰라?
김동환!”
“그 간나새끼는 유부남이 아님메?”
“그런 넌?”
“..........”
김동환 때문에 밀렸다니 너무 서럽다. 속이 상해 백석이
훌쩍훌쩍 운다. 우는 아이를 보니 허준도
마음이 안 좋다. 등을 토닥이면서, 그리고 도리도리 하면서
달랜다. 그때 문득 허준은
낮에 본 자야가 생각난다. 백석의 시 나타샤를 암송하던 자야가. 자기가
나타샤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하던 자야가.
“근데, 왜
자야한테 안 가고 여기 있어?”
“분위기 좀 잡지 안았갔어. 우리들 사랑은 나타샤처럼 불행하다고, 같이 있고 싶은 맘 굴뚝같지만
아바이한테 붙잡혀서 고향 에메나이한테 가야 한다고,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얘야, 순진한
아이 가지고 놀면 못써. 아무리 기생이라도 순정만큼은 열녀인 아이야.”
반듯한 사람이고, 자신을 가장 아껴주는 친구인 허준이
그렇게 말하니, 백석은 부끄러워 얼굴이 소라방등처럼 붉어졌다. 소라방등이라, 밖에는 김 냄새나는 비가 내리는데, 아,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가 그립구나.
“너 난이 생각하는구나?”
“.........”
“신현중이
그러는데, 난이가 이렇게 말했대. ‘싫어예.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 싫어예.’ 그러니 그만 잊어. 어차피 남의 여자 아니니.”
아무리 남의 여자라도 그렇지. 제일 속이 상한 건 난이가 신현중과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배신도 이런 배신이 어디 있는가. 소개시켜
줄 때는 언제고, 정혼을 약속한 여자까지 있는 놈이 도로 빼앗아 가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근데, 나타샤가
누구니? 난이? 정희? 자야?”
“...........”
“제발 갈켜주라. 궁금해 죽겠어.”
“그게 무시기 중요하다고, 에메나이들한테 치이는 내 신세가 쓸쓸하지 않슴메? 이건 쪽팔려서
만주에라도 도망을 가던지 해야지, 그래도 자네같이 살뜰한 임자가 어드레 있갔어. 그때 편지함세. 그럼 뉘긴지 알게 될거구마. 이제 고마 밤이 늦었으니 눈이나 붙이자야.”
김 냄새나는 비가 내리는 밤, 좁다란 방의 흰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의 지친 불빛이 꺼진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던지 결국 백석은 모든 걸
내팽개친 채 진짜 만주로 떠났어요. 그리고 허준에게
편지를 씁니다. 근데, 제목이 ‘허준’이네요.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마하고 살뜰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고 하셨던가요.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거위처럼 떠돈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둑판을 당기는구려.”
감동을 먹은 허준이 훌쩍훌쩍, 마침내는 꺼억꺼억 소리내어 웁니다. 나타샤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고. 그래서일까요? 해방이 돼도 백석이 북쪽에서 내려오지 않자, 허준은 백석을 찾아 임진강을 건너, 대동강을 건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오호! 통제라, 그 허준이 그립습니다. 이효석, 이태준 등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당대 조선의 최고 소설가라는데, 백석도 화려하게 복원되었는데, 언제쯤
우리는 다시 허준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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