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것은 늘 상상을 자극하기 마련입니다. 목소리를 듣고 짐작해 보는
얼굴, 소리들 듣고 그려보는 풍경. 그 신비로움 가득한 세계를 작은 건전지 하나면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라디오가 품은 가장 큰 미덕일 꺼예요. 하지만 영화는
어떤가요? 꿈꾸던 것을 어떻게 하면 보다 실감나게 눈으로 보여줄까를 자나깨나 고민해야
하는 영화는, 어쩌면 우리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파괴시키는 주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영화와 라디오는 참 안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요? 하지만 영화는
언제까지고 라디오에 대한 일방적인 향수와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안녕! UFO>에서는 집에서 자체 제작한 라디오프로그램을 틀고
다니는 순진한 버스운전기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는 비 오는 날에 틀어달라며 늘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청하곤 했어요. 피해자가 ?참 부드러웠다?고 진술한 그 희고
긴 손으로 쓴 엽서로 말이죠. <접속>의 한석규에게 전달된 낡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레코드 판에 대한 아릿한 느낌도, <봄날은 간다>의 은수와 상우를 연결 시켜주던
그 ?솨~ 셔~?하던 대나무 밭 소리도 라디오라는 공간이 가지는 고립된 정서와 참
많이 닮아있기도 해요.
어느 순간 주인공들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장치로 많이 쓰여지고, 운전하는 사람이나,
수험생들의 친구가 되고 만 라디오지만, 한때는 위풍당당한 전 지구인의 벗이였던
시절도 있었죠. 우디 알렌의 <라디오 데이즈>는 이렇듯 오로지 라디오만이
삶의 기쁨이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듬뿍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텔레비전의 침공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40년대 초반, 뉴욕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한 <라디오
데이즈>는 라디오에 얽힌 에피소드와 함께 친척들이 북적대는 대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그 시절의 호흡으로 넉넉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의 곳곳을 추억이 담긴
유년기의 히트곡과 40년대 재즈곡으로 채워 넣기도 했구요. 유태인 10대 소년 조는
친척들이 북적거리는 브룩클린의 후질근한 집에서 자라납니다. 조의 유일한 즐거움은
라디오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맨하탄의 세계를 훔쳐보는 것이죠. 그 중 조가 가장
열광하는 라디오 스타는 바로 가면을 쓴 정의의 사나이인데, 조는 이 정의의 사나이가
사용하는 암호해독용 반지를 사기 위해 그의 가족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기 위해
모아둔 돈에 손을 대게 됩니다. 늘 자신의 영화에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우디
앨런의 얼굴을 <라디오 데이즈>에서는 볼 수 없어요. 대신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처럼 나레이터로 등장해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어쩌면 우디 앨런은 나이든
자신을 등장시키지 않는 이러한 거리 두기를 통해 그 시절의 향수 어린 풍경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노력 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굿모닝! 비에~트남~? 고래고래 소리치던 로빈 윌리엄스의 모습도 기억하시죠?
재담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로빈 윌리엄스의 매력의 엑기스가 가장 시원하게
분출되었던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내용은 가물가물해도 그의 이 시원한
외침만은 웬만해선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무미건조한 베트남의 미군 방송사에 나타난
괴짜 DJ 애드리안. 그는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솜씨에 유머를 버무려
그간 지루하고 따분한 방송에 지친 전우들의 귀를 신나게 만듭니다. 거기다 쉬지
않고 금지곡들을 틀어대는 돌발적인 행동으로 전장에 활력을 불어 넣죠. 물론 군의
고위 간부들은 이런 애드리안의 돌출된 행동이 맘에 들리가 없습니다. 끝내 상부와
마찰을 빚게 되는 애드리안은 베트남전쟁의 진짜 현실을 목격하게 되고 결국 베트남에게
?굿모닝?이 아닌 ?굿바이?인사를 건네게 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배리 레빈슨은
진지하고 무겁게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는 올리버 스톤과는 달리, 1평반의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 매우 경쾌한 방식으로 반전을 설득해 나갑니다.
보통 일반 라디오프로그램이 PD와 작가, DJ로 구성된 소박한 구성체라면, 라디오프로그램
안에서 가장 버라이어티한 면모를 자랑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라디오 드라마 일
꺼예요. 특히나 컴퓨터로 많은 것을 해결 하기 전엔 방금 뽑아낸 음향효과와 분주하고
급박한 발걸음소리가 가장 많이 들려왔을 곳이기도 하구요. 극작가 출신의 미타니
고키 감독의 첫 번째 영화데뷔작인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라디오
드라마 생방송을 둘러싼 해프닝을 마치 한편의 연극처럼 펼쳐 보입니다. 라디오 드라마
공모에 당선된 주부이자 초보작가인 미야코는 첫 방송을 앞두고 꽤나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스튜디오 안은 리허설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왕년의
대 스타였고 여전히 방송국내에서 파워를 휘두르는 성우 노리코는 평범한 주부역할이
싫다며 자신을 조금 더 극적인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길 요구합니다. 프로듀서는 결국
노리코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고 역할의 이름도 ?메어리?로 바뀌게 됩니다. 이쯤 되면
다른 성우들도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요. 모두들 하나같이 이름을 바꿔 버리게 되자
라디오 드라마 배경은 어느 순간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동되고 ?메어리?의 연인의
이름은 엉겁결에 패스트푸드 포장지에 쓰여진 ?마끄도나르도?(맥도날드)가 되어버립니다.
온 에어의 불이 밝혀진 가운데서도 계속되는 소동극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그러나, 어떻게든, 방송은 나간다? 방송계의 정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원제인 <라디오의 시간>이 주는 느낌처럼 참 작고 소박하지만 정신 없이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엔딩으로 치닫고 있는 영화기도 하구요.
크리스챤 슬레이터가 가장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에 찍은 <볼륨을 높여라>는
라디오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고,
<오아시스>에서 공주는 나무를 자르는 종두를 향해 창 밖으로 라디오를
꺼내면서 볼륨을 키우기도 하고, <러브 액츄얼리>에서도 한물간 왕년의 록
스타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가서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지금까지 잔 여자들 중에
최악이었어?라는 방송사고에 가까운 발언을 하기도 했어요. 게다가 최근에 본 <말죽거리
잔혹사>의 어린 연인들은 라디오에서 나온 친추하의 노래 속에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도 하잖아요. 이렇듯 곰곰이 돌이켜보니 라디오가 등장하는 영화는 참 많기도
하군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걸요. 끊임없이 영화가 라디오를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어쩌면 한때 '라디오스타'를 죽였던 비디오들의 애교스런 사과인사가
아닐까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