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 글짱 in 라디오 > 91.9 세상
 
  조회:
이지랄 샘의 좌충우돌

이제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요정이 등장하는 가슴 설레는 낭만 이야기가 아니다. 늪지대처럼 깊고 어둡고 유쾌하지 않게 근질거리는 지난 여름에 관한 이야기인데, 꼭 십 년 전 이맘때도 이처럼 무더웠다.   

  부산 비엔날레 구경 가는 길. 이지랄 샘이 습한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차창 밖 풍경을 넋 놓고 쳐다본다. 꼭 십 년 전 이맘쯤 아주 오랜만에 옛날 여자가 찾아왔었다. 이지랄 샘은 아주 오랜만이었으므로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그래서 반가웠으므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옛날 여자의 표정은 밝았다. 결혼할 여자를 둔 이지랄 샘의 표정 역시 밝았다.   

  바로 그때였다. 축 처진 술집 회벽의 낡은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한 건.  

  “어머! 집에 갈 시간이 지났네.”  

  시계바늘이 한 몸으로 뒤엉켜 하늘을 향해 있었다. 옛날 여자의 얼굴에서는 밝은 빛이 사라지고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신데렐라처럼 서두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내일 결혼해. 아차, 이젠 오늘이구나.”  

  옛날 여자가 건네는 청첩장을 이지랄 샘이 텅 빈 가슴으로 받았다. 결국 옛날 여자는 허물어진 뒷모습을 남긴 채 부랴부랴 서부행 막차를 타고 떠났다. 이지랄 샘은 떠나는 차 꽁무니를 향해 크게 한번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그날, 집으로 가는 길 이지랄 샘은 술기운에 눌려 머리도 다리도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렸다. 왠지 눈물이 앞을 가려 세상이 흐리게 보였다. 결혼식 날 신부가 술기운에 눌려 머리도 다리도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릴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시작부터 흐린 세상을 맞을 옛날 여자를 생각하니 이지랄 샘의 두 눈이 먼저 아팠다.    

  어느새 이지랄 일행을 태운 자동차가 대전을 지나고 있다. 잠시 쉴 겸 시원하게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휴게소로 자동차가 들어선다. 일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일행 모두가 요기를 하러 식당으로 몰려갔지만, 이지랄 샘은 입맛이 없는지 도로 차안으로 기어든다. 그리고 무슨 상념에 잠기는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차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지랄 샘이 눈을 뜬다. 누군가 이지랄 샘을 빤히 쳐다본다. 아, 이럴 수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걸 봤어. 어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십 년만에 다시 찾아왔다는 지난여름의 무더위는 어느새 옛날 여자가 되었다. 옛날 여자는 세월의 재가 켜켜이 내려앉아 슬픈 눈을 가졌다. 아주 오랜만이었으므로 이지랄 샘은 텅 빈 가슴으로 옛날 여자를 반갑게 맞았다.   

  두 사람은 꼭 십 년만에 다시 만나 길을 떠났다. 옛날 여자의 고향이 있는 서부의 해안도시로 길을 떠났다. 이 도시는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처럼 불안정해서 인적이 드물었다. 그것이 두 사람에게는 더 좋았다.   

  마침내 옛날 여자의 집까지 오게 되었다. 옛날 여자의 집은 깊은 수렁 같다. 사막처럼 적막하고, 정육면체의 공간은 공기가 끊긴 대기권 밖의 기층처럼 시간이 멎어 있다. 공간의 반은 거실이다. 낡은 싱크대의 수도꼭지는 바싹 말라있다. 빛바랜 소파의 붉은 천은 신전에 바쳐진 희생양의 혈흔 같다. 공간의 반의반은 욕실이다. 흰색이었을 욕조는 누렇게 탈색이 되고, 물기는 말라 검은 띠가 되었다. 나머지 반의반은 침실이다. 두 사람이 꼭 껴안고 누워야 될 침대는 삭아서 바스러질 것 같다. 이 모든 정물 위로 세월의 재가 켜켜이 내려앉아 보는 눈을 아프게 한다. 축 처진 침대의 회벽에 걸린 낡은 액자가 아픈 시선을 끈다. 화석이 된 두 남녀가 죽어서도 떨어지지 못하고 꼭 껴안고 있다.   

  “폼페이 화산 유적에서 발견된 두 남녀의 화석이야. 남자를 껴안은 여자의 손을 봐. 이천 년이 지나도 그 마음이 아직까지 살아있지 않니?”  

  이지랄 샘은 침대 맡에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자리에 누웠다. 옛날 여자 역시 자리에 누워 이지랄 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정육면체의 공간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폼페이처럼 옛날 여자의 고향인 서부의 해안도시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 세게, 더 세게 껴안아 줘. 이 손은 죽어서도 놓지 않을 거야.”  

  이지랄 샘은 텅 빈 가슴으로 옛날 여자의 허리와 머리를 꼭 껴안았다. 그때 켜켜이 내려앉아 있던 세월의 재가 부유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정육면체의 공간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제 운명은 또 다시 찰나와 천겁 사이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뭐야? 그새 자는 거야?”  

  식당에서 요기를 마친 이지랄 일행이 우르르 차안으로 기어든다. 오늘은 이지랄 샘의 친구의 친구가 참여한 비엔날레를 구경하기 위해 부산 해운대에 가는 날이다. 사실 비엔날레는 핑계이고, 십 년만에 다시 찾아왔다는 더위를 피해 피서를 가는 길이다. 아주 오랜만에 콧바람을 새러 가는 길이란 들뜨기 마련이고, 이지랄 샘처럼 감상에 젖게도 만든다.   

  “왜 갑자기 옛날 여자라도 생각난 거야?”  

  “꼴에 무게 잡긴.”  

  “이왕 생각난 김에 재밌는 첫사랑 얘기나 해봐.”  

  “첫사랑은 무슨.......”   

  아주 오랜만에 찾은 해운대는 많이 변해 있었다. 낡고 쓸쓸한 시골스런 풍광이 사라지고 네온 빛이 찬란한 이국적인 해변으로 바뀌었다. 그 울창한 소나무 숲들은 어디로 갔을까? 해변으로 길게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모든 것들이 아쉽다. 해운대 바다는 동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곳으로 그 운치가 남다른 편이었다. 물은 적당히 차고 깊고, 해돋이와 달맞이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래도 서울 촌놈들이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신나는 모양이다. 밤새 백사장을 싸돌아다니고, 밤새 술을 퍼 마신다. 며칠 먼저 내려와 있던 이지랄 샘의 친구 친구의 세심한 배려로 바다까지 와서 회는 먹지 않고, 복어찜에 대구탕에 가자미탕에 술을 마신다. 그 맛이 일품이다. 백사장 귀퉁이 예전엔 낡은 포구였던 곳의 언덕배기에 있는 대구탕집, 해운대시장을 찾아가다 만나는 가자미탕집, 부산에서는 납세미라고 불러야 한다. 그곳의 그 맛을 이지랄 일행은 잊을 수가 없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이지랄 일행은 쓰린 속을 붙잡고 비엔날레 구경하러 부산시립미술관엘 간다. 이지랄 샘이 정영창의 작품 ‘SSAL(쌀)’을 본다. 칠판보다 훨씬 넓은 캔버스가 시선을 압도한다. 세 가마니의 쌀알을 일일이 칠하고 손으로 눌러 붙였다니 그 정성이 갸륵하다. 불에 탄 쌀알처럼 시커먼 바탕에 푸른빛이 어른거린다. 혼백을 불러오는 주문 같아 숨이 턱 막힌다.   

  이지랄 샘은 괜히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을 나와 이번엔 나이지리아인 올루 오귀베의 작품 ‘Ashes(재)’를 본다. 집 하나를 설치작업 한 것인데, 결코 낯설지 않다. 집은 깊은 수렁 같다. 사막처럼 적막하고, 정육면체의 공간은 공기가 끊긴 대기권 밖의 기층처럼 시간이 멎어 있다. 낡은 싱크대의 수도꼭지는 바싹 말라있다. 빛 바랜 소파의 붉은 천은 신전에 바쳐진 희생양의 혈흔 같다. 흰색이었을 욕조는 누렇게 탈색이 되고, 물기는 말라 검은 띠가 되었다. 두 사람이 꼭 껴안고 누워야 될 침대는 삭아서 바스러질 것 같다. 이 모든 정물 위로 세월의 재가 켜켜이 내려앉아 보는 눈을 아프게 한다. 축 처진 침대의 회벽에 걸린 낡은 액자가 아픈 시선을 끈다. 화석이 된 두 남녀가 죽어서도 떨어지지 못하고 꼭 껴안고 있다.   

  ‘남자를 껴안은 여자의 손을 봐. 이천 년이 지나도 그 마음이 아직까지 살아있지 않니?’  

  이지랄 샘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침대 맡에는 남자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액자 속에는 남자를 껴안은 옛날 여자의 손이 꿈틀하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