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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 Conte 이별은 카덴차 형식으로

                     이별은 카덴차 형식으로

                                               글쓴이 | 바람에 안장 얹기

 

 

- 아파시오나토(열정적으로)


맨델스존 바이올린 콘체르토 넘버 2. e minor, op.64

창문이 닫힌 차내는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가 풍선에 공기를 넣듯 차를 부풀리고 있다.

‘열정적으로’라는 지시만큼 엑셀 위에 올려진 민수의 발에도 힘이 들어간다. 감미로운 음악의 대명사라 할 맨델스존의 음악이, 새벽 4시 전속력으로 한계령 고개를 넘는 지금의 민수에게는, 죽음의 언덕으로 유혹하는 고혹적인 사자의 손놀림과 같다.

‘2악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1악장은 12분 54초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 시간 안에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핸들을 잡은 민수의 손을 떨게 한다.

전방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그의 마지막을 주시할 뿐이다. 어서 일을 끝내라고, 주저하다가는 모든 일을 망치고 말거라고, 넌 어차피 그런 놈이라고.


물고기 눈처럼 커진 동공으로, 산해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고통으로 일그러진 동공 너머로 서서히 사그라지던 환희의 흔적. 한 달 전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라며 나중에 신혼집을 꾸밀 때 걸자고 샀던, 100호 짜리 그림 대신 축 늘어진 산해의 시신을 발견했던 순간이 유령처럼 밤하늘을 떠돈다.


- 모데라토 칸타빌레(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에 해바라기 씨 같은 까만 눈동자, 검은 단발머리. 요즘 여자들이 좇는 유행과는 거리가 먼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 산해의 모습이다.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 내가 ‘산해야’하고 낮게 부르면 떠오르는, 물그림자 같은 모습이 있다. 초점이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함께 있어도 시선을 놓아버리고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 버리는 산해의 정지한 듯한 시선이다.

산해를 처음 본 건, 학교 앞 레코드 상점 안이었다. 그 날은 가을비가 처량하게 내리는 날, 상점주인은 다른 날과 달리 라디오를 켜놓고 있었다. 외부 스피커에선 마크노플러의 영화음악이 방랑의 현을 자극하듯 흘러 나왔다. 아일랜드 풍의 악기소리와 가을비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의 연인처럼,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누구를 만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 나는, 음악소리에 끌려 레코드 상점 앞에서 우산을 접고 오래 서 있었다. 대학생활 마지막 학기를 시작한 지금, 묘한 서글픔이 내부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1년 전 갑자기 이유 없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집안의 모든 것을 팔아치운 지 오래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나, 여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이었기에 모든 상황은 내게 제로상태에서 시작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바로 그때, 내 앞으로 불쑥 우산 하나가 밀려들어왔다. 깜짝 놀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접히는 우산 너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에 화가 나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방 안에서 CD 한 장을 꺼내 주인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주인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말하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연기를 하는 배우와 같다고 생각되었을 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이유는 묻지 말라, 그냥 목소리를 들어야 전체 그림이 완성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저씨. 이 CD 엉터리예요. 튀어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요즘 CD가 뭐 옛날 LP도 아니고.. 튀는 거 없어요. ”

“...튄다니까요. 한 번 들어보시면 알잖아요.”

“헛참 이 아가씨 고집은...나 여기서 20년 장사했지만 LP 팔 때도 한번도 이런 적 없었다니까 그러네.”

“...”

낮은 목소리, 그러나 탁하지 않고 속으로 잦아드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낭랑하면서도 낮은 목소리. 

여자는 아저씨의 거부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주인의 눈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결국 아저씨는 CD를 확인했고, 2악장 쯤에서 미세한 떨림을 발견했다. 맨델스존의 바이올린 곡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떨림은 음악전문가가 아니면 짚어내기 힘든 아주 작은 떨림이었다. 달리보면 녹음시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그런 실수였다.

“참... 아가씨 음대생이우. 대단하네. 이걸 문제삼을 정도면...알았어요. 내가 다시 새 거로 주리다.”

 

- 카덴차(끝내기 전 격렬한 즉흥연주)


그 때 산해는, 내게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였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 후 3년 후쯤, 인사동 술집에서 다시 산해를 만났다. 산해는 이름이 꽤 알려진 소설가와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 끼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선생님 술을 마시는 건 일시적인 자살행위래요. 어떤 영국놈이 얘기한 건데 이름은 생각나지 않구요. 하여튼 선생님은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허허 난 그냥 술이 좋은데? 요즘 자주 필름이 끊기는 게 문제지만,,, 필름이 끊기고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는 걸 일시적인 죽음이라 한다면 그 말이 일리가 있겠군. 결국 내 의지로 마시는 거니까 자살이라 해도 맞는 말이겠지.”

“그렇죠, 선생님. 자, 여러분 우리 한 번 죽어보자구요. 건배...!”

전혀 다른 모습, 전혀 다른 색깔의 똑같은 그림을 만나는 기분. 그랬다. 그날의 산해는 어느 가을날 내가 만난 여자가 아니었다. 광기어린 눈으로 세상을 다 집어삼킬 것 같은 욕망의 화신과 같았다. 그 자리의 사람들은 산해보다 5년에서 10년 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 보였고 산해의 모습을 귀엽게 여기는 듯해 보였다.

여전히 세상의 몰염치와 몰상식함에 분노하며, 상사의 단점이나 씹고 있던 나와 친구들에 비해 산해의 모습은 한 손에 칼을 들고 전사들을 호령하는 잔다르크처럼 나를 압도했다. 그래 나도 잠시 일상을 잊고 일시적인 자살행위에 빠져보자는 심정으로 술을 들이키다 화장실로 향하던 나는, 전봇대를 붙잡고 오바이트를 하는 산해를 보게 되었다.

다가가 산해의 등을 두드려주고, 내 손수건을 건네주며 산해와 난, 만났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서.

지금 생각하면, 휘몰이 장단처럼 산해라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용광로에 살이 녹듯이 내 일상의 일탈은 산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일탈’에 있었다. 일탈은 일상성과는 정반대 항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일상성을 떠나는 것, 탈피하는 것, 버리는 것..산해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엷은 막을 둘러쓴 알 같았고, 막을 뚫기에 난 너무도 현실적인 남자였다. 


6개월의 동거생활동안 산해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여대 법대를 졸업했고, 졸업후 글을 쓰기 시작해 라디오 음악방송의 구성작가일을 하고 있다는 게 다였다. 산해는 일을 하러 나가면 이 삼일씩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산해가 들어오지 않는 날은 산해가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들으며 산해의 상태를 짐작할 뿐이었다. 시간에 쫓기는 구성 작가들의 생활을 익히 알곤 있었지만...자세한 얘기도 없이 핸드폰마저 꺼 놓은 산해를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아니 힘들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원한 동거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나...엄마 보고싶다.”

“엄마? 어디계신데...한 번도 말 안해서 난...”

“그리고...내 아기도 보고싶다...”

“...뭐?..”

삼일 만에 집에 들어온 산해는 집에 있는 양주 한 병을 다 마시더니 이렇게 내게 말했다. 아이가 있다고, 이제 세 살 된 남자 아이라고...삼척에 엄마가 계시고 그 엄마가 아이를 키우고 계시다고. 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그가 과거형의 사람인지 현재형의 사람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단지,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산해를 보면 절벽에 서 있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두려웠다. 언제든 내 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기정사실처럼 내 속을 휘돌았다. 그렇지만...이건 너무 빨랐다.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는데...

떠난 사람은 나였다. 전세방을 산해에게 준다는 메모와 함께, 발을 쿵쿵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에.


- 라르고(천천히, 천천히)


눈도 오지 않은 길을 설맹이 된 것처럼 2시간째 헤매고 있다.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날 산해는 내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것이었다. 자신을 좀 잡아달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무너지고 말 거라고...하지만 내 자존심은 날 더 냉정하게 몰아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저 멀리 바다의 끝이 훤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민수야, 넌 내게 너무나 충분했어...”

눈물이 떠오르는 해를 허물어뜨린다. 

차는 어느새 삼척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