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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꽁트 - 구 월 의 소 나 타

글쓴이 | 바람에 안장 얹기


나의 이름은 선물맨이다. 남의 어려움을 대신 맡아 해결해주는 대신맨과는 차원이 틀린 이름이다. 그럼 내가 산타클로스처럼 몸과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해 축복을 나눠주는 선물맨인 줄 알면...실망스러울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온갖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섭렵하여, 각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내용을 편지와 엽서에 써 보내고, 사연이 채택되면 작게는 도서상품권이나 화장품에서 최고 성능 좋은 노트북이나, 드럼 세탁기, TV 등을 선물로 받는 일이다. 얼핏 이런 나의 생활을 비웃는 사람들 중에는 날 거의 사기꾼 취급하는데, 각 프로그램의 성격을 파악하고 매 주당, 월당으로 내거는 새로운 이벤트에 적절히 맞춰, 글을 쓰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단지 매번 내 이름을 걸기 어려워, 사돈에 팔촌의 이름이며, 중학교부터 대학 동창의 이름과 주소를 도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이럴 경우 당첨이 되고나면 난 반드시 내게 이름과 주소를 제공한 사람에게, 10분의 1의 사례금 또는 선물을 준다.


내 나이 스물 여덟, 군대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한 후로 한 1년은 백수로 지냈다. 이 시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내 심정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의 삶이 나보다 나을까? 한달을 술로 살고, 두 달을 방바닥을 청소하며 살고, 세 달을 이력서 쓰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나머지 여섯 달은 눈치 주는 엄마의 눈을 피해 PC방에서 살았다. 게임이란 게임은 다 휩쓸어, 밤 샘 작업으로 눈앞이 어지러울 만큼 아쉬움 없이 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 늦잠 자는 내게 포화처럼 쏘아대는 엄마의 잔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라디오를 켰을 때였다. 오전 10시쯤이었을까,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남자 D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가물가물 들려오던 목소리는 내게 점차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
DJ-오늘의 사연은 좀...짠한 얘깁니다. 결혼하자는 청혼을 받은 지 일주일, 남자친구는 우리 집에 인사 오겠다고, 언제가면 되느냐고 자꾸 조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이미 말했고, 엄마는 아프다고 계속 미뤘다. 마루 하나, 방 하나...조그만 우리 집을 선뜻 보여주기 쉽지 않았다. 그런 내 맘을 알 턱이 없던 엄마는 오늘도 하루 종일 누워있다. 집에 들어서면서 짜증이 났고 짜증의 끝은 언제나 “해준 게 뭐야!”라는 칼이 되어 엄마에게 날아간다. 화딱지에, 눈물에 냉장고 문을 확 열어젖히는데...그 안엔 커다란 파인애플이 두 개. “이게 뭐람” “니 그 결혼한다는 친구 오늘 다녀갔다. 너하고 같이 오려고 기다리다 니가 바빠서 혼자 먼저 왔대...내가 아프다고 파인애플 사 왔다는데 나도 그 녀석 온다길래 파인애플을 사다놨지 뭐냐...그 녀석 아주 선하니.. 사람 좋게 생겼드라.” 나만 빼고 다 착한 세상, 냉장고 문을 붙들고 서서 소리내어 운다...다른 사람의 홈피에서 좋은 내용을 보고 글로 올리셨다는데...진애씨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 엄마가 되어서야 그 시절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신다고...돌아가신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다고 쓰셨네요. 네...진애씨에겐 살림에 도움되시라고 드럼세탁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라디오를 듣는 동안 갑자기 섬광처럼 내 머릿속이 환해졌다. ‘바로 이거야!’하는 느낌이 딱 맞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런 내용쯤은 수백 개도 더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잘만 쓰면 수십 만 원 짜리 선물을 받을 수 있다지 않는가.
이 날부터 난 인터넷의 블러그와 싸이 홈피를 쏘다니며 재미난 사연을 채집하기 시작했고
,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기에, 사연 또한 무궁무진했으니 잔머리의 귀재인 내게,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내가 보낸 사연은 족족 당첨이 되었고, 우리 집에서 나의 존재는 발 닦이에서 황제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나의 의기양양함이란...
비우면 채워지고
, 채워지면 비워지는 자연의 순환논리는 내게만은 적용불가 판정을 받은 듯 우리 집 거실은 선물로 채워졌고, 그것으로 족히 넉넉한 생활의 여유를 누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었던가
. 내겐, 아침에 일어났더니 머릿속이 표백되듯 하얗게 변색돼 있었다.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남의 얘기 중 중요한 알맹이만을 쏙쏙 빼먹고 다니던 나, 가볍기 그지없는 글쓰기로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는 대가로, 썩은 고기를 받아먹던 하이에나가 이제 갈 곳을 잃고 만 것인가?
이건 순차적으로 삭제 버튼을 누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그냥 사라져버린 거다. 머릿속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종적을 감춰버린 거란 말이다. 그간 거의 1년을 벌어먹었으니 그럴 만 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으나...이건 너무 갑작스런 실종이 아닌가.


그 후로 그냥 걸었다. 산책이라 할 것도 없이 넋을 뺀 사람처럼 공원이며 산이며, 호수며 아파트 주변을 그냥 무식하게 걸어 다녔다. 내 머릿속의 알맹이가 어디쯤 떨어져있기라도 하듯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것이 하얀 집이었다.

하얀 집이 있는 곳은 대형 아파트 촌 사이, 이삼 층짜리 주택가 외곽의 자리였다. 신도시답게 주변 조형에 신경 쓴 덕에 아파트와 주택가 사이에는 좁지만 작은 시내가 흘러갔고, 하얀 집 앞은 아카시아 나무와 벚나무 몇 그루가 지키고 있어, 아파트의 메마른 전경과는 다른 정취가 느껴졌다. 그렇게 그곳을 자주 드나들던 어느 날, 하얀 집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른 날도 종종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이 정확히 오전
9시부터 12시 사이였음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첼로와 피아노, 바이올린 소리 사이 사이 기타 소리까지, 귀에 익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 내 발은 자연히 그 앞에 서있기를 몇 번, 내 앞에서 하얀 집의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녀가 나왔다.
두 사람은
60세가 넘은 듯한 노부부로, 두 사람 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챙겨든 모습으로 길을 나섰다. 깊은 산사의 맑은 시내 같은 얼굴,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랬다. 그 옆의 할머니는 거의 몸을 할아버지에게 기댄 채 걸으며 무언가 열심히 얘기를 하는 듯했다. 무엇에 홀린 듯 난 두 노부부의 뒤를 따랐고, 음악소리는 어느덧 할아버지의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왔다.


가을의 정령이 나뭇잎 사이에 몸을 부린 듯
, 9월의 하늘에 옅은 가을의 내음이 떠다니는 아침이었다.
“오늘은 마리가 날 안 찾아왔어
, 여보. 새벽 내내 잠을 깨고 기다렸는데..당신 혹시 마리봤어요?”

“아침에 나가는 거 봤어요. 당신 잠시 잠들었을 때...내가 당신 깰까봐 어서 가라고 했어요.”

“왜 가라고 했어. 난 보지도 못했는데에~ 오늘 재밌는 얘기 해준다고 했는데...흐윽.”

“왜 또 그래요? 우는 거 몸에 나쁘다고 했잖아요.”

계속 뒤를 따르는 날 의식했는지, 할아버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내 쪽을 힐끔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보게...이리 좀 와봐.”

갑자기 걸음을 멈춘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덜컥 놀란 난 어찌할 줄 모르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자네 지금 안 바쁜 것 같은데...잠시 심부름 좀 해주겠나? 조기 슈퍼 가서 물하고 아이스크림 좀 사오게나.”


난 마치 내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돈을 받아 슈퍼에 다녀왔다.

두 부부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다가서자 얼른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껍질을 까려했지만 제대로 손놀림이 되지 않아 결국 할아버지가 까 주었다.

“옆에 잠시 앉게나...왜 우릴 쫓아왔나?”

“....어..그냥 산책하다가 하도 음악이 좋길래 뒤를 따라 걷다보니..그렇게 됐습니다.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그동안 자네가 아침마다 우리 집 앞에서 멈춰 음악을 듣는 걸 알고 있었네...산책을 좋아하나보지..”

“그냥 할 일이 없어서...흠~!”

아이스크림을 제대로 들고 먹질 못해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손이 범벅이 되어있는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할머니의 손과 입을 닦아주었다.

“죄송한 말씀인데...할머니 혹시..”

“치매냐구?...다들 그런 줄 알지. 그것보다 좀 더 오래된 병이야.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할까. 30대에 그렇게 됐으니 한 30여년이 넘었구만.”

“아까 마리란 분을 자꾸 찾던데...따님이신가요?”

“그 소릴 들었나?...허허 마리는 이 사람 이름이네. 워낙 욕심이 많고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그림 그리던 화가였어. 헌데 전시회 몇 번 후 사람들의 질시와 실패의 경험을 이겨내지 못한 거지. 사람이 너무 맑아서 그래.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자꾸 안으로만 들어가더니...어느 날 어린아이가 돼버렸어. 이렇게 됐다고 이 사람이 주변 사람들이나 날 힘들게 하진 않았네. 오히려 날 더 행복하게 해주었어. 웬 줄 아나? 이 사람은 언제나 날 필요로 하니까.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지. 젊을 때 한 순간 모든 게 너무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사람이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네.”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었는지 할머니는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뺨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가슴 속에 따뜻한 물이 찰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