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랄 샘의 좌충우돌
회화 선생 윌리암은 비가 올 때마다 피가 온다고 한다.
그에게 내리는 피는 비지만, 우리에게 오는 비는 피였다.
온 몸이 온 마을이 피에 젖는다.
-강창민 詩 ‘비가 내리는 마을’
이지랄 샘이 근무하는 학원에도 윌리암이라는 회화 선생이 있었다. 윌리암이 이 학원으로 오기까지에는 원장의 빽으로 영어 강사까지 하는 교무과장의 공이 참으로 컸다. 왜냐하면 영어 강사 일을 그만두고, 교무과장 일만 하게 되면서 빈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무과장은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 영어 강사 일을 그만두면서 그만큼 수입이 줄었다. 자의로 그만둔 게 아니라 타의로 그만두었으니 그 속이 얼마나 쓰릴까?
“뭡니까, 이게? 봉숙이 나빠요.’
요즘 교무과장은 술만 취하면 TV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개그로 묘사해 인기를 끌고 있는 ‘블랑카’ 흉내를 지겁게 해댄다. 봉숙이는 원장 사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원장의 사촌동생이니 자신에게 형수가 되는데도 없는 데서 봉숙이라고 흉본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원장 사모 때문에 영어 강사에서 짤렸다.
원장 사모는 이 학원에서 부원장이고, 원장실보다 큰 방을 상담실이라고 꾸며서 학부모 상담을 한다. 교무과장이 원장의 빽으로 영어 강사까지 했지만, 실력이 짧아 학생들에게 ‘빈 깡통’ 소리를 들을 정도니 학부모들 원망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부원장 입장에서 수족을 자를 수밖에.
그런데 윌리암의 등장으로 더 곤경에 빠진 사람이 생겼다. 바로 이 학원에서 근무하는 5명의 영어 강사들을 총괄하는 영어과 팀장인 한선생이다. 캐나다 어학 연수생 출신인 한선생은 얼마 받는지는 불문율이어서 알 길이 없지만, 이 학원에서 페이가 제일 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전문분야는 영어회화다. 윌리암도 당연히 회화가 전문분야다. 교무과장을 영어 강사에서 자르면서 부원장은 회화파트를 보강한 것이다. 그것도 미국 본토 출신으로.
“생긴 게 꼭 블랑카처럼 생겼네.’
“맞아. 봉숙이 남편처럼 생겼어.’
윌리암에게 감정이 안 좋은 교무과장과 한선생은 그를 블랑카라고 놀린다. 사실 필리핀계 미국인인 윌리암은 얼굴형이 동남아 출신을 연상시킨다. 이민 3세란다. LA에서 죽 살았으며, 필리핀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태권도를 좋아하고,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 철학을 공부하러 유학을 오게 되었다고.
“근데, 한국 철학이 뭐지?”
“글쎄?”
“우리보다 훨씬 낫네. 동양철학이니, 서양철학이니 하면서 남의 것만 공부했는데.’
그런데도 교무과장과 한선생은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다. 기특하게 여길 만도 한데, 너무 젠 체한다고 불만인 모양이다. 특히 한선생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애들이 그러는데, 윌리암이 간혹 Apple을 아플이라고 발음하고, Back을 빡이라고 발음한다는데...”
“그놈 되게 웃기는 놈이네. 지가 무슨 개그맨이라고.”
“왜? 유머 감각도 있고, 보기 좋은데.”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기말시험이 모두 끝나고, 방학이 코앞이라 모처럼 학원이 한가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다만 긴 장마에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어서 사람들 마음 역시 썩 유쾌하지 않아 여느 때보다 일찍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원장과 부원장을 비롯해 모든 강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교무실. 오직 한 사람만이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찬스를 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윌리암이 가방을 챙겨 막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 사람이 윌리암에게 소리를 질렀다.
“사안 까 뿌뿐따.(Saan ka pupunta.)”
그 요상한 말을 윌리암이 얼떨결에 되받았다.
“띠얀 량.(Diyan lang.)”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모였다. 윌리암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 사람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너 필리핀이지. 애플을 아플이라고 그러고, 백을 빡이리고 할 때 짐작했어. 그게 필리핀식 영어거든.”
그때 교무과장이 끼어들었다.
“그럼 진짜 블랑카였네. 근데, 한선생은 필리핀 말을 왜 그렇게 잘해?”
“아, 그건......”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윌리암은 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달아났다. 원장과 부원장은 침묵했고, 한선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학원의 영어수업은 예전처럼 정상화되었다. 교무과장이 예전처럼 영어 강사도 맡았고, 한선생도 예전처럼 팀장으로서 제자리를 찾았다.
‘사안 까 뿌뿐따’는 필리핀식 인사말이다. 그 뜻을 따져보면 ‘지금 어디에 가느냐’고 묻는 질문이지만,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말로 하면 ‘안녕 하세요’와 같은 관용표현이다. 우리식의 인사말도 꼼꼼히 따져보면 ‘간밤에 안 죽고 무사하셨군요’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인사말에는 민족마다 각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 필리핀의 경우 자기 것을 지키지 못하고 얼마나 싸돌아다녔으면 그런 인사말이 다 생겨났을까? 마젤란이 필립왕에게 바친 나라, 필리핀 스페인 식민지 333년, 미국 식민지 45년, 영어가 자국어처럼 돼버린 나라.
“봉숙이 진짜 나빠!”
봉숙이는 부원장을 이르는 말이다. 교무과장의 말에 의하면, 윌리암은 부원장의 친구 남편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대학까지 다니다 집안이 몰락해 돈 벌러 왔다는 윌리암은 관광비자로 들어와 그대로 눌러앉아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대학까지 나왔다는 말에, 원래 필리핀이 영어 잘하기로 소문난 터라 부원장의 친구는 자기 아이의 과외를 윌리암에게 시켰는데, 효과를 보았단다. 그래서 부원장이 윌리암을 새롭게 포장해서 학원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도 부원장은 윌리암 문제를 아직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윌리암이 두고 간 가방에서 편지 한 통이 나왔다. 캐나다가 아니라 필리핀 어학 연수생 출신인 한선생이 대충 해석해 주었다.
‘엄마, 한국 사람들 너무 좋아요. 돈 많이 벌어서 엄마 병 고쳐 드릴게요.’
이지랄 샘이 술집에 앉아 쇼윈도 밖 풍경을 본다. 어느새 또 비가 온다. 윌리암은 어디에서 이 비를 맞고 있을까. 그에게 있어 한국에서 내리는 비는 피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몸이, 온 마음이 피에 젖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