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adio Conte 약국여자와....아스피린
소년
글쓴이 | 바람에 안장 얹기
‘디제이-드디어 장마가 시작됐나봅니다. 어제 밤엔 천둥치는 소리에 잠 설치신 분들 많았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비를 아주 좋아하는데, 너무 많이 와서 또 큰일 당하시는 일은 없어야겠죠. 오늘 같은 날 이 노래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라디오헤드의 ‘노 서프라이즈’...’
“와 이리 비가 오노 구질구질 하게스리. 아유 다 젖어삐릿다 이거.”
“뭘 또 가져오셨어요.”
“비도 오고, 니 아버지도 묵고 싶다 카길래 부추전 좀 안 했나. 많이 묵지도 못할 걸...뜨거울 때 퍼뜩 묵으라.”
불쌍한 고모, 보리빗자루 같은 몸으로 아버지를 돌보느라 더 늙어 보이는 고모. 당뇨는 곁에 있는 사람마저 삭아버리게 만드는가. 약국문 밖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바쁘다. 좁은 인도엔 사람보다 우산이 더 많이 보이고, 우산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 같은 오후다.
아까부터 울리는 진동소리. 받고 싶은 마음과 그러지 말자 하는 마음의 싸움. 벌써 1년째다. 그와의 만남은, 어쩌다 돌린 TV채널에서, 뜻밖의 좋은 영화를 만나는 그런류의 우연과는 달랐다. 필연을 가장한 우연. 세상의 잣대로 말한다면 난, 유부남을 만나는 나쁜 여자다. 그것도 친구의 남편을.
우리 셋은 대학미술동아리에서 만났다. 약대를 다니는 나와 무용을 하는 친구, 그리고 그는 어엿한 정외과 장학생이었다. 이런류의 삼각관계는 이미 신물 날 정도로 드라마에서 써먹는 소재이니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서른셋의 노처녀인 내게, 그는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나타났다는 거다.
“니는 시집 안갈끼고. 니 아버지 죽기 전에 손주 얼굴을 한 번 보여줘야 되지 않겠나?”
“고모는 또 그 소리, 죽는다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리구 나 같은 노처녀 누가 데려나 갈라구?”
“그럼 임자만 나타나면 갈 맴은 있는 기가?”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한 여학생이 뛰어 들어온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구석에 던져놓고, 껌을 질겅거리며 다가선다. 옆의 고모를 힐끗 쳐다보고는 누구랄 것도 없이 한마디 툭 내던진다.
“아줌마, 그거 좀 줘요.”
“그거? 그게 뭐야?”
“아~이, 그거 있잖아요. 왜 이렇게 말을 길게 시켜.”
옆에선 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을 쏘아댈 참이다. 잠깐 동안 머리를 굴리던 나는 그제서야 그 여학생의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피임약! 그거였다.
약국 근처엔 대형 입시학원이 서너 개 운집해있어서 손님의 반이 학생일 정도다. 얘처럼 약을 찾는 애는 그래도 낫다. 허리선보다 짧게, 가슴팍이 미어지도록 꽉 끼는 교복 상의를 입고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며 떼 지어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 싱그러운 젊음이 청춘의 덫에 걸리지 말기를 간절히 빌고 싶어진다.
“아이고 말세구마. 말세야. 허이구 주여~”
고모는 못 참고 한마디 하고 만다.
여학생은 돈을 치른 후 약을 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고모를 한번 힐끗 쳐다본 후 우산을 들고, 바닥에 침을 한번 찍 뱉고 나간다.
약국에 있다보면 본의 아니게 여러 아이들을 보게 된다. 시험강박증에 시달리는 아이는 신경안정제와 우울증 치료제의 처방전을 들고 오기도 하고, 잠 안 오는 약을 달라고 떼쓰는 아이도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었다. 윤영준. 외고에 들어갈 정도로 수재였던 남학생이었다. 밤 10시 반 쯤, 학원에 가기 전 꼭 한번씩 들러 아스피린 두 알을 달라고 했다. 아스피린은 한통씩 판다고 해도, 꼭 두 알을 달라고 떼를 썼다. 180센티미터의 키에 짙은 눈썹을 가진 아이의 눈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두 알 씩 팔게 된 게 꽤 여러 날이 되었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이 바로 3년 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밤 12시 문을 닫으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영준이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뛰어 들어왔다. 난 너무 놀란 나머지 뭐라 묻지도 못한 채, 영준이의 이마를 치료해주었다. 영준이도 별 말 없이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아버지 골프채에 맞았어요.”
눈이 동그래진 나를 외면한 채, 영준이는 계속 먼 곳만을 바라봤다.
“난 음악이 하고 싶은데...말이 먹혀야 말이지. 워낙 꼴통이니까 말해봤자 소용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몰래 밴드 만들어서 연습하고 있었는데...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습격했어요. ㅋㅋ. 악기 다 부수고, 집으로 끌고 가더니 마구 패는데...그 꼴통이 힘은 어디서 나는지, 씨발.”
아버지는 외무고시를 보기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영준이는 꼭 지미 핸드릭스 같은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대학 때부터 팝 중에도 락에 관심이 많던 나는 밤새도록, 머리 깨지고 온 몸에 멍든 영준이와 함께 음악 얘기를 했다. U2며 OASIS, NEWTROLLS 등, 관심을 공유한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던 밤이었다. 외동아들에게 거는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준이의 심정이 익히 이해가 되었던 나였기에, 그날의 대화에 더욱 열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빨 빠진 사자가 돼버렸지만, 이북 출신의 깐깐한 자존심과 강한 생활력으로 무장됐던 아버지는, 여자에게 약사만큼 안정된 직업이 어딨냐며 아버지가 알아서 입학지원서를 냈을 정도였다. 그 앞에서, 그렇게 확신에 찬 아버지의 얼굴을 맞대고, 아니다, 미술대학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던 나였다.
역시 아버지의 예측은 적중했다. 결국 내가 우리 집안의 생활비를 책임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영준이는 몇 번 약국을 들러, 내게 자신이 하고 있는 밴드일에 대해 얘기를 했고, 나는 몇 번 그에게 밥을 사줬던 것 같다.
동생뻘로도 한참 아래 동생이었지만 영준에게는 나이와 관계없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누나라기보다 그가 오빠 같은 그런 느낌. 입시철이 다가오면서 영준의 방문이 뜸해졌고, 난 현관문에 달린 풍경소리가 울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손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후 영준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또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떤다. 자꾸 이러는 그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어쩌자는 건가. 아무것도 해결하고 싶지 않으면서, 나를 포기하지도 못하는 남자. 자신의 아내의 친구에게, 아내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남자. 자신은 더 큰 꿈이 있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임신을 하는 바람에 발이 묶인 거라고, 자신은 꼭 외교관이 될 수 있었다며 투덜거리는 남자. 친구와 결혼 전에도 서너 번 고시에서 떨어진 경력이 있었던 것을 벌써 잊은 것인지, 아니면 못다 이룬 꿈을 향한 화풀이의 대상을 아내로 점지한 것인지, 그는 그렇게 나만 만나면 징징댔다.
그런데 왜 이런 남자를 만나느냐구? 글쎄, 거기에 인생의 아이러니가 준비되어 있는 거 아닐까.
처음 그는 임신한 아내를 위해 어떤 철분제가 좋은지 내게 연락했다. 우리는 대학동창, 친구였으니까, 그런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했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친구에 대한 부러움을 숨긴 채 몇 개의 철분제를 들려 보냈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아내를 핑계삼아 약국에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점심때는 밥 사 달라, 저녁에는 직장 상사 새끼 때문에 열 받는다고 술 사 달라...근데 이런 그가 밉지 않았다. 천개의 손을 가진 천수보살의 운을 타고났는지, 약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존재를 밀쳐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이 내게 있었다. 그가 내 남자가 아닌 건 분명한데, 그는 점점 내가 자기 여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보니 나도 어느새 전이가 되어 행복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겐 단지, 그의 넓은 등만 필요했는데...거기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가 말하는데, 진짜다.
비밀은 향수와 같다. 여자들이 향수를 뿌리고 바르는 것은, 그 향을 통해 다른 세계의 나로 거듭나고 싶다는 심리가 깔려있다. 매혹적인 향속엔, 숨길 수 없는 자아도취와 타인을 향한 욕망의 엑기스를 휘발시키는, 강력한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향수는 더 넓게, 더 많은 사람을 향해 자신의 향을 내뿜고 싶어 한다.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 향수와 비밀의 존재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삼류드라마가 연출되었다는 거다. 그러나 우리의 영특한 남자친구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전화는 단지 이별을 위한 간주곡일 뿐이다. 추하게 헤어지기는 싫은 거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 챙겨서 옥상으로 가려는데 현관 풍경이 울렸다. 열리는 문 사이로 비 냄새가 훅 끼쳐왔다. 우산을 접어 구석의 통에 가지런히 꽂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오늘은, 아무나 불러 술 한 잔 하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나...!”
한참 남자를 쳐다보고서야 영준인 줄 알았다. 멋진 청년이 되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어....너?”
“누나, 오늘은 좀 일찍 끝내지. 오늘은 내 돈으로 술 살 거야. 알았지!”
인생의 숨 가쁜 게임. 롤러코스터 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