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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바람에 안장 얹기
그녀는 요즘 내내 선거 홍보용 포스터 제작에 정신이 없다. 잡지 기자였던 그녀가
편집디자인 사무실을 차린 이유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순전히 나 때문이다. ‘우진
씨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게.’ 언제나 자신 만만한 그녀.
그런 면이 그녀의 매력이었고, 우리 사이를 유지하는 끈이기도 하지만 가끔 내 숨에
벅찬 그녀다. 그녀가 원하는 결혼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나도 역시 그 일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치인의 사진을 찍는 일. 지금껏 10년을 해온 잡지 광고사진보다
내가 더 싫어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 달만 고생하면 아파트 평수가 10평 더 넓어지는
거야라는 그녀의 말에 그냥 동조의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녀의 어떤 요구도 다 받아들이는 이유에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 내 인생에
어떤 결정적인 결핍이 있다는 생각. 사진이든 그녀든 무언가에 열중한다고, 모든
걸 다 걸고 뛰어든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것들은 언제나 내 살이 되거나 에너지가 되지
못했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지금, 그녀는 여전히 왕성한 에너지를 뿜으며 일과 결혼준비를
착착해내고 있었다. 이에 반해 나는...뭔지 모를 불안일지, 허전함일지 뭐 그런 것들이
마음 한 구석을 자꾸 긁어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봉투 하나가 배달됐다. 일주일에 한번 강의를 나가는 대학,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물이 도착하기 시작했던 무렵이었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내 던져 놓은 봉투 중에 하나였다. 그 날 오후 늦은 아침잠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무료함을 즐기고 있던 때였다. 그때 내 눈에 누런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통의
학생들이라면 당연히 보내는 이의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 봉투에는 내 이름 말고
발신자의 이름이 없었다.
봉투 속에는 한 장의 사진만 들어있었다. 사진의 하얀 뒷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을 때 한 쪽 눈을 감는 것은 마음의 눈을 위해서야. 사랑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앞의 사진은... 헉!!! 무언가를 찍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가슴 한 쪽이 툭 떨어졌다. 난생 처음 간절히 원하는 것 앞에 서 있는 기분, 강렬한
가슴의 울렁거림과 미칠 것 같은 소름이 온 몸을 관통하는 기분, 그것이었다.
사진 뒷면에 써 있는 글귀는 바로 내가 쓴 것이었다.
5년 전 한 참 잡지 사진 일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신촌 거리에서 스트릿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때 당시 잡지 기자였던 그녀와 함께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였다. 초겨울의 날씨답지 않은 포근한 겨울 오후의 거리는, 사람들로 바글대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를 만났다.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짜여진 털모자를 깊게 쓰고 친구와 걸어오던 아이를 보았던
건 그녀가 먼저였다. “재다. 우리가 찾는 이미지야.” 그리고는 아이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부탁했다. 아이는 응하겠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불분명한 엷은 미소로
나의 카메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질문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거의 아이의
친구가 했고, 아이는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와 나의 카메라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17세, 고등학교 2학년, 실업계 고등학교의 디자인과 학생. 그녀가 원했던 건
아이였기에 끈질긴 질문을 되풀이 한 끝에 드디어 아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죠?”
“...하고 싶은 건 다 이루었어요.”
“...다 이루었다! ㅎㅎ 열일곱 살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굉장히 조숙하군요.
무얼 다 이룬 거죠?”
“지난 여름방학 때 힙합에 빠져 내내 춤만 췄어요. 그 다음 음악학원에 등록해서
작곡 공부를 했는데 아니더라구요. 내 길이 아니었어요.”
그녀와 나는 몇 초 동안 잠시 말을 잊었다.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아이에게 나는 약간의 경외감마저 느꼈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빠져있는 것은 사진이며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사진일기를 올리고 있다고 했다. 허나 디지털
사진기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다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이젠 아나로그 사진기로 찍고 싶다며 내 사진기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던 나는 사각의 렌즈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의 강렬한 눈빛에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아이의 눈은 카메라처럼 주변의 대상을 관찰하고 포착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이는 자신의 카페주소를 주며 꼭 한 번 사진을 봐 달라고 말했다. 아이의 부드러운
당당함, 자신을 향한 명료한 욕망, 거기에 무언가 비밀스런 막이 나를 긴장시켰다.
그 후 난 잠시 아이의 존재를 잊고 있다가 수첩 사이에 껴 있던 아이의 카페주소를
발견하여 들어가 보았다. 아이의 사진은 하늘과 노부부의 사진, 신발 그리고 자신의
셀프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부부의 사진 아래는 ‘나의 전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엄마 아빠’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의 부모라기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란 쪽이 더
어울렸다. 미숙했지만 노인들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그 후로 아이와 나는 몇 번 만났고, 내가 일하는 곳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아이는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엔 말없이 자신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는 내 사진을
좋아했다. 특히 모델이 아닌 삶의 한가운데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진을 좋아했다.
당시 인물 다큐식의 잡지 표지를 의뢰받아, 현장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 후 아이와 난 어떤 이유에선지
만나지 않게 되었다.
추억을 되살리는 일은 아쉬움과 동경의 반복이다. 잠시였지만 당시 난 그 애를
통해서 내 삶이 소중하구나 하는 충만감에 잠겼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되고 말았다.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이미 텅텅 비어버린
폐타이어.
“혹시 예전에 ‘서울 위크엔드’ 잡지 만들었을 때 기억나? ” 난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잘 못 견디는 놈 중에 하나다. 그 애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녀는 뭔 말이냐는 듯 한심하게 날 바라봤다. 그 날 밤 난 그 애의 꿈을 꾸었다.
배터리가 약해진 핸드폰처럼 내 몸이 깜박깜박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계속 내게
다음 스케줄을 알려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해져버렸다. 차를 운전하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두리번두리번 무언가를 찾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 애가 어느
날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서른다섯의 봄은 너무도 잔인했다.
밤 12시 15분 까다롭기로 소문난 G 후보의 사진을 찍느라 하루 종일 시달렸다.
시간만 오래 끌면 좋은 사진이 나올 거라 믿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람은 좀 심했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함께 주차장으로 갔다. 뜨거운
단팥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웨스트 라이프의 마이 러브’였다. 내가 왜 이러지.
여자들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일 치루느라 예민해진 것도 아니고, 하여튼 세상의 모든
노래가 다 가슴을 치는 건 분명 그건데...
“진. 우. 씨-- ”
“어? 어! 어 왜?”
“자기 요즘 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해. 이상하면 치과가”
“ㅋㅋㅋ. 그 썰렁한 유머가 여전한 걸 보니 아직은 정상인 것 같네. 빨리 집에
가서 와인 한 잔 하자. 으유 그 노친네 그 얼굴에 뭐 달라질 게 뭐 있다구 사람을
고생시키구 있어 정말. 아~함~ 졸리다. 어서 가자 진우씨.”
“디제이- 한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아이한테는 예순이 넘은 나이 드신
부모님이 계셨데요. 늦둥이냐구요? 아니었습니다. 이 나이 많으신 부모님들께서는
여자아이를 맡아 기르고 계셨데요.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세살 때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배를 타는 분이셨는데, 아이를 보살필 수 없어 친척집에 맡겨두셨나봐요.
친척이라고는 했지만 아이는 천덕꾸러기였겠죠. 다섯 살 때부터 말을 잃었답니다.
그 후 이곳저곳 떠돌다 지금의 목사님 부부에게 맡겨지게 됐답니다. 그 때가 열 한
살이었대요. 목사님 부부에게 가서도 한 동안은 말을 하지 못했답니다. 일부러 나쁜
짓도 많이 해서 이 분들이 나를 얼마나 참아낼 수 있을까. 시험을 했답니다.”
“이거 뭐야. 뭐 이런 얘기를 해. 이 밤에 심난하게스리. 다른 데 돌려.”
“잠깐만 나둬 봐.”
“디제이- 이 아이가 그 후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사진계의 떠오르는 신동이죠.
바로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진 전시회의 주인공인 한여민 씹니다. 양부모님의 사랑덕분에
이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그 간의 얘기를 담은 에세이도 출간한다고 합니다.
저희 작가가 인터뷰를 했는데...자기에게 사진이 뭔가를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분은 아마 여민 씨가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있을 거라고, 그 분을 꼭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압니까. 아는 분이 듣고
소식 전해주실지. 아~ 우리 방송 워낙 인기 있으니 꼭 들으실 거라 믿습니다. 성함이
이...우진씹니다. 꼭 전시회 가보세요.”
“아!!! 말두 안돼, 우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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