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슴도치 사랑
"DJ -몇 년째 읽지 않는 책들...오랫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먼지 앉은 CD...언제부턴가 누르지 않게 돼버린, 휴대폰 단축 번호와 이메일 주소...아무렇지도 않게 네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나...한때는 서로 위로가 되었던, 그러나 이제는 일상에서 소외된 것들...(김영주 카툰, UNDO)
송파동의 김연지 씨께서 보내신 시인데요. 제목이 ‘일상에서 소외된 것들’입니다. 아까 방송 전에 한번 읽어봤는데 참, 가슴이 아릿하다고 할까요. 뭐 그런 기분이 남는 시였습니다. 언제부턴가 누르지 않게 돼버린 휴대폰 단축 번호...청취자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한번씩은 다 갖고 계실 거예요. 갑자기 몇 년 전 헤어진 여자 친구가 생각나는군요. 흐흐 오늘같이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치는 날엔, 봄바람에 마음 설레는 분들도 많으시겠습니다. 아~갑자기 동해 바다가 보고 싶네요. 신청하신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어으 점장님 저 시 너무 좋죠. 제목이 뭐라구 했드라? 당장 사구싶다.ㅋㅋ”
이곳은 오피스가와 오래된 주택가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동네 한 모퉁이, 작은 샌드위치 카페다. 뉴욕 스타일의 크라제 버거와 참치 베이글 샌드위치를 주 메뉴로 한 탓에 근처 디자인 사무실의 직원들과 주택가에서 들리는 단골만으로도 하루가 분주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의 시간, 200m 앞 번잡한 4거리에서 벗어나,싸아한 아침 공기가 새처럼 조용한 골목길에 내려앉는 모습을 즐기는, 나만의 시간이다. 또 하나, 보통 오후는 음악전문 케이블의 클래식 음악을,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있으나 오전 1시간만은 라디오를 켠다. 특별히 아침방송 남자 디제이의 목소리를 음미하거나, 그의 매력에 빠져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과 내가 소통하는 방법이 라디오이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사연들과 그것을 이어가는 음악에 잠시 시간을 잊는다. 그리고 양상추와 피망과 양파와 토마토가 물에서 방금 나와 맑은 이슬을 머금는 모습을 감상한다.
“수민아 점심 재료 다 준비해 놓았지?”
“아이, 당근이죠. 근데...아 참... 칠리 피클을 아직 준비 안했네--;; 바로 들어갑니당...어! 점장님 저 사람 또 왔어요. 오늘도 역시 파자마 바람이네. 아우 꼬질꼬질해”
일주일에 두세 번 아침 이 시각이면 카페를 찾아 카푸치노 커피와 베이글 토스트를 먹고 간다. 그가 찾는 메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스스한 머리에, 매번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들리는 그를 보고 수민이는 그 옷이 파자마용일 거라 놀리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한 동안 이곳을 찾지 않은 지 오늘이 꼭 한 달만이다.
“오랜만이시네요. 똑같은 거로 드릴까요?”
“아...아니요. 오늘은 에스프레소 꼼빠냐로 주세요. 베이글 하구요.”
울림이 기분 좋은 목소리다. 다시 보니 눈매가 슬프네...
에스프레소 향은 불륜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치명적인 향, 그 향의 여운이 오래가지 못할 거란 아쉬움에 오래도록 작은 잔을 어루만지게 하는.
“바쁘셨나봐요.”
“얼마 전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것도 라디오를 통해서요. 그 소릴 듣고 내내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안본 지 5년도 넘었는데, 그 애가 나와 헤어진 후에도 줄곧 나를 생각해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버리지 못했던 마음을 감사해야 하는데 난... 갑자기 여자들이 무서워지더군요. 아 죄송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지...”
오랜 시간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처럼, 그는 내게 얘기를 쏟아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친구 분한텐 오랜 시간이 아니었을 거예요. 한 사람을 위한 시간으로 5년은 아무 것도 아니죠.’ 입 밖으로 말하진 못했다.
라디오에선 캣 스티븐스(Cat Stevens)의 `모닝 해즈 브로큰(Morning Has Broken)`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학시절의 한 장면이 ‘붙이기’ 기능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캣 스티븐스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시절. 청평에서의 MT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를 하며 난 시 한 구절을 읽었고, 형준이는 기타로 이 곡을 잔잔하게 연주해주었다. 청명한 밤하늘, 소금처럼 빛나는 별빛, 달콤한 밤바람, 기타 현을 뜯는 소리. 스무 살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점장님 핸드폰!! ”
“어!...어 여보세요....”
“......”
며칠 째다. 발신번호가 뜨지 않는 전화다. 누굴까. 내 짐작이 맞지 않길 바란다.
“점장님은 어떤 남자랑 연애하고 싶으세요? 난 말이죠. (작은 소리로) 저기 앉아 있는 남자같은 사람만 아니면 되요. (핸드폰 보며)오빠는 왜 전화를 안 하는 거야. 아직도 안 일어났나. 으이그 게으르긴 정말.-=;;(속보이나? ㅎㅎ) 에스쁘레소 꼼빠냐나 뽑으러 가자.”
“DJ-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죠. 사랑으로 밥 먹고, 사랑으로 행복하고 사랑이 이 세상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 믿는 부류와 사랑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순 없다. 사랑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열에 들떠 잠시 오아시스를 볼 뿐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을 이해하는 것만이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류.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스트라토 바리우스(Strato Varius)의 Forever입니다.”
“어서오세요. (호들갑떨며) 어머어머! 저 남자 좀 봐요. 넘 멋지다. 디카프리오 닮았죠. 어! 근데 저 사람 파자마한테로 가네? 불가사의야 이건!!”
디카프리오는 인사도 않은 채, 파자마의 앞에 앉았고, 파자마가 베이글을 다 먹도록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디카프리오는 파자마의 입가에 붙어 있는 베이글 가루를 뚫어지게 보는 듯도 했다. 둘은 마치 음악 감상실에 온 사람들처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하나도 빼먹지 않겠다는 듯,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쇼펜하우어가 만든 우화 중엔 ‘고슴도치 콤플렉스’라는 우화가 있다. 너무도 추운 겨울 어느 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두 마리의 고슴도치는 깊이 껴안았다. 그러나 따뜻함을 느끼는 순간 서로의 가시가 상대의 살을 찌르는 걸 보았다. 몇 차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순간 두 마리의 고슴도치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다. 사랑하지만 가까이 하면 상처를 주는 슬픈 관계. 파자마와 디카프리오는 외부의 바람을 등으로 막아주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두 마리 고슴도치 같았다. 마치 몸이 묶인 두 마리 새처럼, 함께 있으나 4개의 날개로도 하늘을 날 수 없는 가엾은 새들.
“쨍그랑!!”
“점장님 괜찮으세요? 어! 오늘 좀 이상하다~ 아프신 거 아녀요?”
“아니야. 내가 치울 게.”
컵을 떨어뜨리다니...뭐지? 자꾸 불안해지는 이 마음은.
핸드폰이 또 울린다. 받기 싫다.
“여, 여보세요.”
그래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재신씨? 나 형준이 누나예요. 오늘 무슨 날인지...알죠? 불쑥 전화해서 미안해요. 연수가, 웬일인지 형준이랑 재신씨 사진을 보며 자꾸 우네요. 사진을 뺏으려 해도 영 놓질 않아요. 애가 지 애비 기일인 걸 알아서 그러나...연수...보고 싶지 않아요?”
왼쪽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 아프다. 산 아래로 추락하는 형준이의 얼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 연수 얼굴과 소용돌이친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마. 내가 널 찌를까봐 무섭다구.
연수야. 내 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