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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정책의 빛과 그림자
극본 : 이석영
연출 : 오성수
▷ 기획의도
분단된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북간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남들은 결코 하지 않을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단의 북쪽은 적인가, 동포인가? 그 답은 늘 가변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인가 하면 동포로, 동포인가 하면 적으로.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걸 반세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꼭 한번 확실한 답을 얻었다고 믿게 만든 역사가 있었다. 2006년 6월, 남북의 정상이 만나 뜨겁게 포용하던 날이었다. 더 이상 적이 안 될 것도 같았고,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도 했다. 그런데 그것도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
DJ의 국민의 정부는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정상 회담이라는 성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대화에는 상대가 있고, 남북관계는 당사자 간의 문제를 넘어 국제사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햇볕정책에서 얻은 교훈이 아닐까?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과 정상회담 이후의 변화된 남북관계 햇볕정책이 좌절하게 되는 과정을 극화하면서 앞으로 남북관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 줄거리
1997년 12월 17일, DJ는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을 자임했다. 그 준비 중에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방안도 들어있었다. DJ는 취임사를 통해 어떤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으며 북한을 흡수·통합할 의도가 있고, 가능한 분야부터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대북 3원칙을 밝혔다.
뒤이어 1998년 4월 25일에는 남북경협 활성화 조처를 발표하면서 정경 분리 원칙도 천명했다. 이러한 대북 화해 정책에 힘을 보탠 것이 정주영이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정주영은 YS의 문민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는데,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92년 6월 16일, 정주영은 소 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일대의 이벤트를 연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최초의 금강산 관광선이 889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동해항을 출발한다. 햇볕정책이 큰 원군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복병도 있었다. 1998년 6월 22일 북한 잠수정 한 척이 동해안에서 예인된 데 이어, 8월 31일에는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남북 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고 만 것이었다. 거기에 미국이 제기한 금창리 핵 의혹도 있었다. 때문에 남북 관계는 한 걸음도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1999년 들어 북미 간에 미사일 협상이 열리고, 5월 28일 미국이 금창리 핵 의혹이 해소됐다고 발표함으로써 한숨 돌리는 듯 했으나, 6월 15일 1차 서해교전이 발생한 데 이어 6월 20일에는 금강산에서 주부 관광객이 북한 당국에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나 6월 22일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악재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8월 2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고, 북미 미사일 문제 타결,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해제, 그리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유예 선언 등 대내외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남북통일 농구대회가 열리고 정주영이 김정일과 면담, 서해 공단 개발을 협의하는 단계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2000년 1월 DJ는 신년사를 통해 남북 경제 공동체 구성을 제의한 데 이어 3월 9일 북한 사회 간접 자본 건설 지원 의사를 밝힌 이른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다. 한편 베를린 선언이 나오기 하루 전인 3월 8일,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북의 송호경 아태위 부위원장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 날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현대의 정몽헌 회장으로 현대가 벌여놓은 대북사업을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 북의 의사를 타진한 바 있었다. 그리고 북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이를 박지원에게 알린 것이 2월초,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했고, 임동원의 건의에 따라 박지원을 특사로 파견했다.
박지원과 송호경은 싱가포르 회담에 이어 3월 17일부터 4월 8일까지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박지원과 송호경 외에 정몽헌도 참석했는데 그것은 남북정상 회담과 현대의 대북 사업이 패키지로 추진됐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특검 수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때 현대는 대북 사업권의 대가로 4억 달러를 제공하는 외에 정부가 1억 달러의 현금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정상회담의 대가성 논란을 불러올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발표한 시점이었다. 박지원 특사는 북과 합의한 이틀 뒤인 4월 10일,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는데 4월 13일 총선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때문에 역사적인 남북정상의 만남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핵심인사 몇몇을 제외하고 정부 각료들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보안이 지켜진 탓에 발표가 나가고 나서야 협상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의 충격과 분노는 컸다. 한미 관계는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이 끝난 후 미국에 특별히 설명하는 등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정부는 통일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4월 22일부터 5월 18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판문점에서 북측 대표단과 실무접촉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 ‘정상회담을 북의 누구와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북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김정일이지만 그는 국방위원장에 불과할 뿐 명목상의 국가 원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다. 만일 그런 이유로 북측이 김정일 대신 김영남을 내세워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런 의구심에 대해 북측 대표단은 끝내 확실한 언급을 피했다. 결국 임동원이 5월 말과 6월 초 두 차례 걸쳐 평양을 방문,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과 정상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조율하는 한편 김정일과의 면담을 통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서울을 출발,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하자 수많은 환영 인파의 환호성 속에 김정일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의 우려가 깨끗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천천히 비행기 트랩을 내려왔고 마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잡았다. 분단 55년만의 남북 정상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방송은 이 역사적인 만남에서부터 남북고위 인사들의 화기애애한 만찬 장면이며 그들이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6?15남북 공동선언이 나오기까지 생생하게 중계함으로써 온 민족이 잠시나마 분단의 아픔을 잊고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주었다.
또한 정상 회담의 효과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장관급 회담이 열리고,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이 이루어지고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북선수단이 함께 입장하는가 하면 이산가족 방문단의 교환도 있었다. 경의선 연결을 위한 기공식이 있었고 백두산 관광단의 방북도 이루어졌다. 모두가 정상회담 이후 9월까지 있었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북한군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하고 올 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북미 관계에도 화해의 조짐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햇볕 정책의 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절반은 햇볕 정책의 공(功)으로 돌려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햇볕의 약점은 바로 구름이 가리면 힘을 못 쓴다는 것이었다. 먼저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 쪽에서였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한때 방북을 고려했던 클린턴 행정부가 물러나고 보수적인 부시 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햇볕을 가리는 구름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남북 관계가 너무 빨리 진척돼 감당하기 어렵고 국민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른바 ‘속도 조절론’이었다. 거기에 김정일의 답방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자연히 햇볕 정책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터져 나온 것이 강정구 교수 방명록 사건이었다. 2001년 8?15민족 통일 대축전 행사에 참가했던 강정구가 김일성의 생가를 방문했을 때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 받아 조국 통일 이룩하자’고 쓴 것이 알려지면서 온 나라에 파문이 인 것이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 사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보수적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김 대통령은 2002년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추진하겠다며 햇볕 정책에 강한 애착을 보였으나 뒤이어 나온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햇볕정책의 추진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더구나 6월 29일의 2차 서해교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햇볕 정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가열되었고 대북송금에 대한 의혹마저 불거져 나왔다.
결국 DJ는 퇴임에 앞서 대북 송금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고, 한 달 후 대북 송금 특검법이 공포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것은 한 정치인의 좌절을 넘어 분단의 현실을 사는 우리 모두의 좌절이 아니었을까?
▷ 등장인물
- 김대중(대통령)
- 박지원(문화관광부 장관)
- 임동원(국정원장)
- 정주영(현대그룹 창업자)
- 정몽헌(전 현대아산 회장)
- 김정일(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 김용순(전 당 중앙위원, 아·태 평화위 위원장)
- 송호경(북한 당 중앙위 부부장, 아·태 평화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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