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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도전과 시련 |
1. 기획의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우리의 70년대, 그 어두웠던 터널을 탈출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는지 되짚어보고자 한다.
현재 소득 2만불 시대를 희망하고 있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경기는 어렵기만 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경제활동을 살펴보고 우리가 다시 한 번 역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집결시켜야 할 것이다.
2. 줄거리
- 1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1970년대, 한국은 여느 개발도상국들과 다름없이 자원확보가 가장 절실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건설의 기초원자재인 국제 원목 시세가 폭등하고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하면서 1차 오일쇼크가 한국을 강타하게 된다. 상공부는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중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다가 비상이 걸리고 수출장벽이 높아지면서 노동집약산업도 급속히 퇴조하게 된다.
박정희는 외교력을 총동원해 공장들이 가동이 중단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효과가 없다. 또한 그 와중에 유신헌법과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발표한다. 오일쇼크와 정치적 불안정이 사회전반을 흔들고 있을 때, 또 한번의 2차 오일쇼크를 맞는다.
- 1950년, 국제무역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승만 정부는 서둘러 영국에 GATT가입을 위해 교섭단을 파견하지만 6.25 동란으로 국가적 추진 계획서를 제출하지 못해 불발로 끝난다. 그 후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GATT 가입의 중요성을 분석하고 적극 검토에 들어가지만 정부부처내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여러 차례의 진통 끝에 1966년 5월 20일 GATT신청서는 제네바의 GATT 사무국에 정식으로 제출된다. 제네바에서는 각 국의 대표들이 몰려 협상에 들어가고 그 때마다 난항을 겪지만 1967년 4월 14일 GATT회원국이 된다. GATT가입 추진 후 무려 17년이 걸린 셈이었다.
- 70년대,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한다. 이와 같은 정부의 강력한 중화학 공업 건설의 발표는 당연히 박정희의 구상이었고 경제계는 어느 분야가 집중화 될 것인지 긴장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3면이 바다라는 입지조건과 에너지가 빈약하다는 점에서 조선산업을 육성시키고자 했고 이병철과 정주영을 만난다. 그러나 이병철은 조선소건설에 회의적이었고 정주영 역시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도망쳐버린다. 그러나 결국 1971년 12월 5일 그리스 레바노스 선주로부터 26만톤급 유조선을 수주하면서 초대형 조선소 건설에 시동을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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