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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와 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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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와 상일은 살아온 환경도 맞지 않고 성격도 취미도 맞지 않는다.(사실 대부분의 모든 부부들이 그렇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부부가 되었나? 사랑했으니까.
그렇다면 정희는 상일의 무엇을 사랑했나?
정희는 상일의 남자다운 결단력과 추진력 책임감 과묵함 성실함 검소함을 사랑했다. 정희는 아버지의 손을 잡듯 상일의 손을 잡으면 행복의 나라로 가리라 믿었다.
상일은 정희의 무엇을 사랑했나?
그는 정희의 청순함과 다감함, 여성스런 손끝과 이해심 많은
넉넉함을 사랑했다. 또 그녀의 가정이 주는 화목한 분위기와 멋진 장인어른도 사랑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두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정희는 상일이 일방적이고 독선적이고 권위적이고 무심하다고 불만이다. (같은 성품이 결혼전에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결혼 후에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상일은 정희가 너무 의존적이서 피곤하고 잔소리꾼이고 무능력하고 무식하다고 핀잔한다. 게다가 아내는 점점 반항적이 되어간다.
상일은 정희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성안(가정)의 완벽한 성지기가 되기를 원하면서 또 성 밖에서 용감히 칼을 휘두르는 능력있는 여기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불복종은 용서 못한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빠져 있는 딜레마다.
물론 상일은 정희를 사랑한다. 자기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얘기다. 그 증거로 그는 동규처럼 바람 피지 않는 자신의 성실함을 내세운다.
또 상일은 말한다. 자신의 사랑은 숨쉬는 공기와 같아서 잃었을 때 확인되는 사랑이다. 사랑한다는 것을 꼭 표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정희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 일부러 배려해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누군가 <착한 것은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곳에 있다>고 했듯이 사랑이란 것도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곳에 있다고...
아주 낭만적인 관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그리고 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이였기에 가능한 관계다. 정희는 극에서 표현된 그대로 도섭의 첫사랑이다. 문예부에서 활동하던 이웃여고의 정희에 비해 밴드부 활동을 하던 도섭의 꿈은 무지션이었다. 고교시절 시화전에서 정희의 시를 보고 남몰래 작곡을 하기도 하던 도섭은 그러나 그의 꿈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냥 평범한 음악 교사를 하던 그는 동료인 미술 교사와 결혼을 하고, 결혼 후 아들이 청각장애자인 것을 알고 뮤지션이 되기를 포기한다. 게다가 아내까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음악과는 영영 멀어지고 만다.
그런 그가 정희의 우울한 결혼 생활을 알게 되면서 작곡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남자에게 있어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은 어떤 존재일까?
도섭의 경우 적어도 첫사랑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원한다는 점에서 순수 그 자체이다.(도섭이 죽은 아내를 살아있는 것처럼 정희에게 계속 얘기하는 것도 자신의 순수성을 의심받기 싫어서이다.)
정희는 도섭의 그 순수한 사랑에 감동 받고 도섭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정희의 사랑은 남편에게서 소외 받는 아내였기에 가능했던 탈출구로써의 사랑이다.
(결혼한지 십년, 이 십 년이 지났어도 연애시절처럼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것은모든 아내들의 헛된 희망이며 헛된 꿈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망상.....)
그렇다. 정희와 도섭의 관계는 일단 낭만과 순수로 보자.
그리고 도섭은 모든 아내들이 꿈꾸는 남편의 대리인이다.
한 여자(정희)를 두고 두 남자( 상일과 도섭)가 사랑한다.
한 남자는 그 여자와 결혼해 15년을 넘게 살았고 한 남자는 그 여자를 먼 거리에 두고 30여년간 마음으로만 사랑했다.
상일은 '현실'이라면 도섭은 '이상'이다.
어떤 여자도 '상일적인 것'과 '도섭적인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상일이 화가 나서 정희에게 말한다
"당신이 그놈과 결혼했어도 그놈이 지금처럼 당신한테 잘할 거 같애? 가서 15년 살아 봐! 그놈의 본색을 알게 될테니! 당신이나 그놈이나 지금은 둘 다 허깨비를 보고 있는 거야!"
맞는 말이다. 상일은 '본색' 이고 도섭은 '허깨비'다
도섭도 정희에게 말한다. " 니가 내 아내가 되었더라면 난 벌써 이런 사랑은 잃어 버렸을 거야.
생각해 봐라. 사십이 넘은 나이에 순정 만화 대사같은 소리나 해대고 말야. 나같은 이런 한심한 놈 봤냐?"

상일의 말대로 사랑은 '허깨비를 보는 것'이고 결혼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 인지도 모른다.
도섭의 말대로 사십이 넘어서도 여자에게 순정 만화 대사같은 소리를 하는 남자는 한심한 놈인지도 모른다. 결혼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바로 '도섭이'가 '상일이'로 되어 가는 것이 결혼의 과정인 것이다.
어쨌든 상일은 도섭으로 인해 아내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는 아무 매력도 상품 가치도 없는 볼품없는 내 마누라를 어떤 놈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지? " 그런 생각으로 상일은 새삼스런 눈으로 정희를 바라본다. 그러자 아내가 돋보이기 시작한다. 젊은 날의 그 매력들이 기억나기 시작한다.
극 후반에서 도섭은 상일에게 '자신이 정희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얘기한다. (도섭은 세월을 잃지 않았다. 도섭이 정희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여고시절 고교시절의 그때이다) 상일은 도섭의 말에 공감한다. 단지 상일은 세월을 잃었을 뿐이다. 그 세월 속에 '사랑의 초심(初心)들'이 풍화되어 날아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