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관련 핫이슈들을 모았습니다.
6.25 특집 앙코르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
작성일 : 2005.06.22
조회 : 

6.25 특집 앙코르「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


  
 
 
방송
      1부: 6월 23일(목) 13:15-14:05, 2부: 6월 23일(목) 14:05-14:55
      3부: 6월 24일(금) 13:15-14:05

  MBC는 6.25 제55주년을 맞아 6.25 특집 앙코르
「이제는 말할 수 있다」<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
  (기획 정길화 연출 김환균)를 방송하고, 6.25 휴전 협정 중에서
  가장 지루하고 논쟁적이었던 포로 문제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은 지난해 7월 18일, 25일, 8월 1일 3회에 걸쳐
방송됐으며, 2004년 8월 방송위원회로부터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은 남과 북, 유엔과 공산 측 모두 다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한국 전쟁에서
유일하게 패자였던 포로들의 버려진 삶을 돌아본다. 무명의 전사들이었던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한국전쟁의 누락된 역사를 복원한다. 전쟁은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켰으며, 이 땅의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전쟁 포로, 그들은 이데올로기 전쟁에 동원된 도구가 아니었는지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에서 살펴본다.

                                                                                               
 - <프로그램 정보통> 발췌 -

  * 관련 링크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홈페이지 | 시청자 의견


* 주요 방송 내용

제 1부 : 철조망 속의 지배자들 (6월 23일(목) 13 : 15 ~ 14 : 05)


* 포로수용소의 초기 지배자는 조폭?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양산된 포로들이 50년 가을, 부산으로 통합,
수용되면서 포로들은 내부의 세력 싸움 에 휩싸이게 된다. 포로들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는 배고픔,
추위, 질병 등 생존이 보다 더 절박한 문제였다. 한 막사 안에서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갔다.
포로출신인 현순호(현 숭실교회 목사)씨는 당시 부산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질과 영양실조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무감각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벌거벗은 시체가 누워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옷을 벗겨서
챙긴 것이지요.”
집단 생활에서는 헤게모니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 한 수용소 내에 5,000명 이상이 수용되었던 당시
부산 포로수용소. 포로수용소의 초기 지배자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포로들을
지배했는가?
“하나의 국가였다.” “완장을 보면 산천초목이 울었다.” “지도자는 대통령이었다.”
당시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포로 수용소의 초기 지배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 그리고
힘센 자들이었다. 힘센 권력자들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포로 자치조직의 주요 요직에
포진시킴으로써 조직을 장악한다. ‘완장’들은 포로들에게 지급되는 보금품을 착취한다든가,
폭력으로 포로들을 위협함으로써 권위를 과시하는 조직폭력배적인 양상을 보였다.

* 친공 포로의 조직은 우익조직에 대한 방어적 조직이었다!

단순하고 원시적이었던 초기의 포로수용소 조직은 좌우로 나뉘고 대립하면서 폭력과 살육을
자행하게 된다. 수용소 내 조직이 이데올로기로 분열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52년 거제도에
파견되었던 심리학 전문가들이 작성한 보고서(1968년 기밀해제, 'Mass Behavior in Battle
and Captivity' 라는 제목으로 출간)는, 수용소 초기 우익이 주도했던 상황에서
친공조직은 우익조직에 대한 ‘방어적’으로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 반공청년단의 숨겨진 실질적 리더 안병섭(가명) 독점 취재! - “UN이 반공포로 조직 지원”

초기 포로수용소의 권력은 남한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의 ‘정보기관’이라는
‘감찰부’를 독차지, 국제연합 전범조사과의 일을 도우며 그들의 권력을 확장해 나간다.
취재진은 반공포로조직인 ‘대한반공청년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안병섭(가명)씨를 독점 취재,
초기 포로수용소에서 권력 획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가, 어떻게 이데올로기화되어 갔는가,
그  비밀을 공개한다. 그는 취재진에게 6시간 동안 숨겨진 비화를 상세히 진술했지만,
공식 인터뷰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그 대신 ‘안’이라는 익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인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가 밝히는 UN 전범조사과와 우익 조직과의 암묵적 거래 관계! 당시 전범조사처
소속 증언자와, 안병섭씨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히 듣는다.
 

제 2 부 : 철조망 속의 전쟁 (6월 23일(목) 14 : 05 ~ 14 : 55)


* 오늘은 인공기, 내일은 태극기! 전복과 전복을 거듭하는 포로 수용소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진 거제도 포로 수용소. 이들은 휴전회담에서 포로문제에 대해
양측대표들이 다툼을 벌일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또한 판문점 천막 안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철조망 안의 전쟁을 벌인다. 수용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쿠데타’는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취재진이 독점 취재한 안병섭(가명)씨는 자신이 주도한 최초의 쿠데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83수용소를 뒤집어엎기로 했습니다. 수용소를 장악한 핵심분자들은 48명,
그때까지 내가 획득한 동지는 150명이었습니다. 48명을 빈 텐트로 잡아와 묶어 놓고 저항하면
두들겨 패도록 했지요. 아침에 태극기를 올렸습니다.” 쿠데타를 통해 전복과 전복을 거듭하는
포로 수용소. 당시 포로들은 밤의 포로수용소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시체는 땅에
파묻거나 ‘각을 떠’ 분뇨통에 넣어 버렸다고 증언했다.

* 포로수용소장 도드, 포로에게 포로되다

1952년 5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장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진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이목을 거제도로 집중시키며 유엔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유엔측의 자유송환을 무력화시키고 휴전협상을 북에 유리하게 이끌려는 의도에서 실행된 것이었다.

* 이탈자를 막아라 - 예비 분류심사

1952년 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송환에 대비해,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와,
남에 남기를 원하는 포로를 분류하기 위한 ‘분류 심사’가 실시된다. 친공포로들은, 강제송환을
주장하는 북한측의 지령에 따라 분류심사의 진행 자체를 방해했다. 반공포로 조직은 이탈자를
막기 위해 혈서를 쓰게 하고 ‘반공’, 혹은 ‘멸공’이라는 문신을 새기게 했다. 망설이는 사람은
송환을 희망하는 자로 낙인찍혀 테러를 당했다. 또 위장된 자체 예비 심사를 통해 북을 선택한
수십 명의 포로들을 폭행, 살해했다.

* 포로들을 위한 UN의 CI&E 프로그램은 포로들의 전향공작을 위한 것이었다!

1951년부터 시작된 UN의 CI&E(Civil Information & Education, 민간정보교육) 프로그램의 명분은
포로들의 사회 적응훈련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CI&E
프로그램은 ‘반공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었다. 거제도 주민인 제익근씨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 포로 분류 심사를 앞서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했다. 민주주의의 장점을 홍보하는 영화가
많았다.”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고 UN군 측이 포로들에게 전향공작을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동안
포로들에 대한 북한의 사상교육(Brain Washing)을 비난해 왔던 UN군의 전향공작의 실체를 밝힌다.
 

제 3 부 : 철조망의 안과 밖 (6월 24일(금) 13:15-14:05)


* 전장에서 승리가 아니면 협상 테이블에서라도 승리를 얻어라!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 UN측은 포로들의 인권을 강조하며 자유 송환을 주장, 공산군측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전원 송환을 주장하며 휴전회담은 지루한 공방을 계속했다. 양측의 대표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설전을 벌이는 동안 전장에서는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 나간다. UN측이 포로
문제로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51년 중반에 미 육군 심리전국에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면 심리적으로 승리를 확보해야 하며, 포로문제에서  자원에 의한 송환원칙이
필요하다는 안을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했다.

* 김일성은 조속한 휴전을! 그러나 모택동은 '미국과의 체제경쟁에서 이기겠다!'

1952년 4월 김일성은 휴전협상에서 전쟁포로 문제를 두고 논쟁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김일성은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수가 포로들의 수보다 더 많다며 모택동에게 조속한
정전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이 문제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포로들이
중국 대신 자유중국을 선택하는 것은 치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체제 경쟁이 되어버린 한국전쟁, 포로는 그 체제경쟁의 제물이었다.

*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이승만의 생색내기 쇼!

휴전협정 타결을 앞둔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들을 탈출시킴으로써
막바지 휴전회담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다. 모택동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으로
석방된 포로들의 숫자만큼 한국군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중국군의 5차 공세가 실행된다.
이 공격으로 금성 전투에서 국군은 1만 5천 명의 전사상자를 내며 치욕적인 패배를 안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외교적 강수를 통해 미국을 압박함으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1953년 6월 6일자 친서를 통해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휴전회담에 협조만 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 무명의 전사들의 전쟁 그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이 되고, 양측은 서로가 승리자라며 선전한다. 전쟁이 끝난 후
휴전회담의 제물이었던 양측의 포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승만의 정치적 쇼의 희생물이 된
탈출한 반공포로들은 대부분 전쟁이 휴전회담이 끝나기도 전에 국군에 편입되고, 휴전협정
조인 후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전장에서 포로가 되어 살아남은 죄로 또다시 남해 용초도로
보내진다. 용초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당시 교환되어 온 국군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
용초도에서의 끔찍했던 사상검증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남과 북에는 억류된 채 잊혀진 포로들이 남아 있다. 국군포로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국군포로 출신의 탈북자들에 의해 미송환 억류 포로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미송환 포로 문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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