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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위기 10년 특집] 그 배는 어디로 갔나
작성일 : 200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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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위기 10년 특집>

‘그 배는 어디로 갔나’

 

■ 기 획: 최병륜

■ 연 출: 한학수

■ 작 가: 이소정


         

방송시간 : 11월 24일(토) 밤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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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 10년, 충청은행원 945명의 삶을 추적>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숱한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고, 멀쩡하던 직장인들이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누구에게나 날벼락 같았던 외환위기, 그로부터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제작진은 금융권 구조조정의 분수령이 되었던 5개 강제퇴출은행(충청, 경기, 대동, 동남, 동화)에 주목했다. 이들은 1998년 6월 29일 금감위원장의 퇴출 발표에 따라 하루 아침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당시 퇴출된 충청은행원 945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작진은 대전시민사회연구소, 빈곤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들의 삶을 추적했다. 이들 중

200여명은 이전 동료들과도 연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고, 주소가 확인되는 사람은 750여명이었다. 이 중에서 465명(20대 1명, 30대 89명, 40대 235명, 50대 이상 140명)으로부터 의미 있는 조사결과를 얻었고, 이를 토대로 정밀한 분석이 이뤄졌다.

 

<나는 더 이상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아니다>

 

강제퇴출 5개 은행연합회 사무총장인 장준배씨의 삶은 퇴출 은행원들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현재 그는 충북 청원군에서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자그마한 업체에서 외국인 노동자 7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명목상 관리부장이지만 회사의 궂은 일을 도맡아야 하는 처지였다. 퇴출 뒤에 아내와 함께 시작했던 김밥집이 문을 닫으면서, 신용불량자로 몰리기까지 했다. 차비도 없던 그때, 장씨는 아내 몰래 결혼 반지를 금은방에 내다 팔수밖에 없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아내의 결혼 예물도 금은방에 가져가려고 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들었던 패물을 다시 내려놓았다’고 한다. 아내는 ‘천원으로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다’며 고통의 날들을 회고했다. 현재 장씨 부부는 10년 전에 살던 대전 시내 아파트를 팔고 변두리에서 전세로 살아가고 있다.

대전 변동지점에서 근무했던 이문수씨는 취재진과 만날 때,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하루 몇 만원을 벌기 위해서 먼지 구덩이에서 일하는 이씨. 그는 이미 화이트 칼라 은행원 시절은 잊었다고 했다. 이씨는 담배 값이라도 벌기위해 공사장에서 버려진 철근을 모아다 고물상에 팔았다. 막노동 말고도 이씨는 두 개의 직업을 더 가지고 있다. 몇년전에 빚을 내서 마련한 정미소와 쌀가게를 통해 두 개의 ‘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딸을 키우기가 어렵다고 했다.

충청은행 퇴출자들의 주거형태도 변했다. 이들은 10년전에 74.6%가 자택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57.6%만이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전월세 비율은 20.4%에서 현재는 35%로 늘었다. 이들의 퇴출 전 월평균 소득은 321만원이었지만, 현재는 평균 186만원에 그쳤다.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던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얼마나 빠르게 분해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통계였다.

 

<가정만은 지키고 싶었다>

 

충청은행이 퇴출된 뒤, 전병술씨는 고향 금산으로 돌아갔다. 전씨는 강제 퇴출에 대한 반감 때문에 98년 광복절에는 태극기도 달지 않았다고 했다. 퇴출 이후 전씨는 가장으로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가족들은 당시의 암울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막내 아들이 ‘아빠는 농협을 다니지 왜 충청은행을 다녔느냐?’고 물었을 때, 뭐라 말 못할 서러움이 가슴을 덮쳤다고 하면서 전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후 전씨 부부는 순대집을 하려고 순대 만드는 방법도 배웠지만, 지금은 결국 약초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충청은행 퇴출 직원 945명중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7명이다. 이중에는 식당 개업을 준비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고, 자살한 경우도 있다. 故진영수씨는 대전상고에서 최상위권으로 졸업한 뒤 충청은행에 입사했으나, 몇 년뒤 퇴출을 맞았다. 하루 아침에 고졸 실업자가 된 진씨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야간대학에도 진학하고 친구들의 돈을 모아 주식 투자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IT 주식 거품이 꺼지면서 이어진 폭락 장세를 피해가지 못했다. 순식간에 몇 억으로 불어난 빚은 끝내 진씨를 자살로 내몰았다. 진씨가 사망한 뒤 태어난 아이는 지금 5살이 되었고, 현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키우고 있다. 취재진을 만난 할머니는 ‘생활이 어려워, 몇 번이나 손자를 보육원에 맡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5살 손자는 지금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살고 있다.

충청은행 퇴출자들의 7.1%가 지난 10년 동안 이혼을 겪었으며, 21%의 부부는 별거를 거쳤다. 퇴출 직후 부부간 갈등을 겪었다는 사람들은 무려 71.6%에 달했다.

 

<국가는 우리를 시장에 내팽개쳤다>

 

충청은행 재건동우회는 당시 퇴출 결정이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이 합병과 같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는 상법상 당연히 주주총회와 이사회의 의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과정은 생략된 채 금융감독위원회의 일방적인 조치만 이뤄졌던 것이다. 이러한 법률적인 하자가 생기자 정부는 퇴출을 집행한 몇 개월 뒤에야 법을 개정해 소급 적용했는데, 이는 법리상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 뒤 국가는 강제 퇴출된 5개 은행원들에 대해 ‘생활안정지원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실상 국가의 잘못을 시인했으나, 단 한명도 실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한 유명무실한 법 조항으로 그치고 있다.

충청은행 퇴출자 중에는 군인 신분으로 당시를 맞이한 사람도 7명이나 있다. 이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복무 중이었으나, 퇴출 과정에서 인수은행에 소명 기회 한번 갖지 못하고 해고를 당했다. 국가는 이들을 철저히 외면했으며, ‘최소한의 예의’도 보여주지 못했다. 지난 98년 퇴출 이후 간염이 악화되어서 간경화 증세를 보이고 있는 김정태씨, 그는 이런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아 그동안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다. 김씨는 ‘대한민국호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배에서 내리게 했다면, 그 뒤로 그 배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갔느냐’고 제작진에게 되물었다.

지난 10년 동안, 시장의 논리만을 절대선으로 섬긴 채 양극화에는 나몰라라 뒷짐을 지고 있는 대한민국호. 과연 그 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장준배씨>

 

 

 <장준배씨의 결혼반지는 팔고 아내에게 남은 결혼반지>

 

 

<담배값이라도 벌기위해 공사장에서 일하다 남은 철근을 모으는 이문수씨>

 

 

<고향 금산에서 아내와 함께 약초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전병술씨>

 

 

<故진영수씨의 5살 아들이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습>

 

 

<김정태씨가 무료 급식을 받았던 예전의 김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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