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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을 기억하는 5가지 키워드

'웃겨야 뜬다' 흥행공식 탈피…'공감얻기' 적중

그동안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MBC 주말드라마 ‘하얀거탑’이 막을 내렸다. 장준혁(김명민)은 외과과장이 됐다가 의료소송에 휘말렸고, 끝내 담관암을 얻어 숨졌다. 이 과정에서 그의 동지가 됐거나 적이 됐던 병원동료들은 장준혁의 죽음 앞에 숙연해졌다. 이들이 장준혁을 보며 흘린 눈물에는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일종의 공포심도 숨어있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현실 속 ‘명인대학병원’에 몸담고 있는 시청자들도 비슷한 성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15∼20%의 시청률이었지만 실제 반향은 50%를 넘은 듯한 ‘하얀거탑’이 남긴 5가지 키워드를 꼽아본다.

#1. 클로즈업

우선 ‘하얀거탑’은 ‘때깔’부터 달랐다. 화면은 때때로 어둡고 침침했으며, 인물들은 하나같이 진지하다 못해 화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청자들을 배려한 ‘해설형 대사’도 없었다. 인물들은 대사 대신 눈빛으로 대화했고, 그래서 이들이 마주앉아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화면에는 이들의 얼굴이 가득 잡혔다. 클로즈업, 또 클로즈업이었다.

내적 고민과 인물간 갈등이 촘촘하게 자리한 ‘하얀거탑’은 시청자를 웃길 틈도 없었다. 누군가 환호하는 순간에는 다른 누가 한숨을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흐르는 OST는 전쟁영화 못지 않게 비장하기까지 했다. 스트레스가 많은 한국에서는 가볍고 웃겨야 뜬다는 공식을 가뿐히 날린 작품이었다.

#2. 안티 흥행공식

‘하얀거탑’은 제작발표회에서부터 ‘기존드라마의 흥행공식 탈피’를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제작진은 ‘하얀거탑’이 사각관계와 불륜 등으로 점철된 한국 드라마의 특성보다는 인물의 직업과 가치관을 파헤치는 미국드라마에 가까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이 드라마가 ‘ER’로 시작해 ‘웨스트윙’을 거쳐 ‘보스턴 리갈’로 끝난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많은 드라마들이 방영을 시작하면, 기획의도와는 다른 ‘안드로메다’로 떠나게 마련이지만 ‘하얀거탑’은 약속을 지켰다. 조직을 위해 헌신하자 1등 신부감을 소개받는 염동일(기태영)의 경우처럼 실제 한국성인들에게 연애 ‘따윈’ 부수적인 것일 뿐. 한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직업이다. 성인들이 하루 10시간 이상을 몸담고 있는 직업에 대한 고찰이 이 드라마를 통해 비로소 시작됐다.

#3. 캐릭터

직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시시때때 변신한다. 천성이 착해도 악해야 할 때가 있고, 동기는 불량해도 좋은 일을 할 때가 있다. ‘하얀거탑’ 속 인물들도 매번 입장을 달리했다. 이주완(이정길)은 퇴직 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10년간 데리고 있었던 제자 장준혁을 밀어내야 했고, 우용길(김창완)은 원장으로 추대받기 위해 눈엣가시였던 장준혁을 지지한다. 언제나 ‘반듯한’ 의사였던 최도영(이선균)은 소신을 위해 조직을 ‘배신’했고, 장준혁을 존경했던 염동일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장준혁의 반대에 섰다.

‘하얀거탑’은 사람이 원래 타고난 ‘천성’ 대신 조직생리에 의해 변해가는 ‘천성’을 그려내며 ‘보통 사람’들의 다중성을 묘사했던 것이다.

#4. UCC

복잡다단한 캐릭터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급부상했다. 드라마 속 비중과 관계없이 거의 모든 배역들이 UCC로 재탄생했다. 온라인에는 ‘내가 최도영이었다면?’ ‘내가 염동일이었다면?’이라고 묻는 글들이 잇따랐고, 이들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별개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아이가 놀랄까봐 차가운 청진기를 데워서 사용하던 ‘청진선균’, 비밀문서를 인쇄하다가 의국실로 연결된 프린터로 열심히 뛰어가야 했던 ‘인쇄정길’,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엉뚱한 남의 집 아이한테 쏟아내던 ‘구강명민’ 등 기발한 별명과 캡처자료들이 온라인을 수놓았다. 이 과정에서 이정길, 김창완, 이희도 등의 중견배우들이 젊은 세대의 ‘완소배우’로 자리잡기도 했다.

#5. 장준혁

캐릭터 중 특히 장준혁이 시청자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쨌든 환자에게 부주의했고, 출세를 위해 비리도 저지르는 이 ‘나쁜 남자’에게 한국 대중은 의아하게도 ‘공감’을 표했다.

장준혁은 이른바 ‘개천에서 용난’ 인물이다. 고급 승용차를 몰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시골을 지키고 계시고, 소위 ‘빽’을 만들기 위해 친구를 사귈 틈도 없었다. 그는 또 ‘우리’처럼 궁지에 몰리면 무릎을 꿇고, 의외의 권력자 앞에서 자세를 고쳐앉는 소심한 약자였다. 부원장 앞에서도 꼿꼿한 부교수 최도영이 ‘의사집안’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과 비한다면, 장준혁의 비굴한 인생은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일반인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조직에 융합할 줄 아는, 혹은 융합해야 하는 조직형 인간을 선호하는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장준혁은 ‘남’이 아닌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포츠월드 이혜린 기자 rinny@sportsworldi.com






2007-03-12 (0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