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정치드라마 `하얀거탑` 킹메이커 정한용을 만나다 [조인스]
J-Only
 

'빛 보는 조연'의 판에 박힌 감동 스토리를 짐작했는데, 예상 완전히 빗나갔다. 헤겔부터 아인슈타인까지 시공과 인문.과학을 넘나드는 얘기 보따릴 푼다.

데뷔 29년차 중견 배우 정한용(54).

"다독을 통한 문학적 소양이 연기에 고스란히 배어나는 배우"라는 안판석 감독의 칭찬, 흰소리가 아니었다. 넥타이 부대를 TV앞으로 소집한 드라마 '하얀거탑' 속 주인공 못잖게 시선을 끄는 조연 정한용을 서울 삼성동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내가 김명민 팬이거든"

정한용이 맡은 극중 민충식은 주인공 장준혁(김명민 분)의 성공을 위해 전방위로 지원하는 장인이다. 사위를 위한 민충식의 물밑작업은 상상을 뛰어 넘는다. 돈 담은 갈비 상자 배달부터 인맥 총동원한 로비에 교통사고 조작까지.

의료사고 소송을 앞두고 단숨에 사위를 방어해 줄 변호단 드림팀을 엮어낸다. 민충식은 개천에서 난 용 장준혁을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부력이다.

어느 땐 진짜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애틋한 민충식의 사위를 향한 눈빛. 이유가 있었다. "내가 김명민이를 진짜로 좋아하거든." 정한용이 씨익 웃는다.

처음 알았다. 두 사람이 5년 전 같은 영화를 찍었다는 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 전이니까 김명민을 아는 사람이 적을 때지." 그때 김명민 연기에 반해 팬이 됐단다. "쓱 쳐다보는데 이 녀석 눈에서 레이저가 나옵디다." 연기는 좋았는데 영화사가 망해 작품은 세상빛을 못봤다. 출연료, 정한용은 받고, 김명민은 못 받았다.

 
 
#"출연해줘 감사한 배우"

"조연도 아닌 조조연."

정한용 스스로 정의한 극중 민충식의 비중이다. 실제로 출연분은 많지 않다. 지난 18일 방영된 14회. 장준혁의 의료사고 공판 장면에서 기억에 남는 정한용의 대사는 "(대질이)잘 됐어."정도다. 나머지는 눈빛이다.

심문에서 장준혁이 코너에 몰리면 민충식 눈에 파도가 인다. 뇌물 줄 때의 눅눅한 비굴함, 조력을 강요할 때 드러나는 적나라한 비열함 모두 눈빛이 그려낸다. "자판기도 동전 넣으면 커피 한 잔은 토해냅니다"라니. 속물의 전형인데 웬일인지 세상 이치를 꿴 노련함이 먼저 읽힌다.

정한용은 민충식을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원리를 아는 인물"로 평했다. 속물로만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헤겔.마르크스를 다시 꺼내 읽었다. 정한용은 소문난 학구파다. 미국 뉴욕대에서 매스미디어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배경지식을 다지고 분해하듯 대본을 분석했다. "결론은 대사를 넘는 눈빛이더라고." 드라마 '흥부네 박터졌네' 이후 두 번째 호흡을 맞추는 안판석 감독은 "정한용은 출연해주는 게 감사한 배우"라고 했다.

#정치인생 '2승 2패'

감각과 노력. 그 외에 정치 드라마에서 정한용이 빛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지 않을까.

정한용은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92년과 97년 대선 땐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 특별보좌역으로 활동했다. 2000년 재선 실패 후 방송에 복귀할 때까지 대선과 총선에서 한 번씩 이기고 졌다.

진짜 정치를 해 본 정치 드라마 속 플레이 메이커의 후일담이 듣고 싶었다. 정한용은 쓰게 웃었다. "혹독하게 산 경험을 했죠." 이어 말한다.

"하얀거탑의 인기는 합리적인 현실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는 극중 민충식의 대사로 정치판 체험담을 대신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돈은 거짓말 안해" "(돈을)먹은 놈은 다리가 흐물흐물하게 돼 있지" 큰 상처를 준 스캔들 사건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어이없는 누명에 죽고 싶을 정도였는데 어느 날 별빛을 보다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뜬금없이 아인슈타인의 광속도불변의 원리를 들춘다. "별빛은 늘 한결같은 속도로 보입니다. 우주 안에 광속보다 빠른 건 없지요. 그런데 저 빛은 이미 오래 전 소멸된 별의 잔상일지도 모른답니다. 별빛에 대면 인간사 대소사 얼마나 하찮습니까."

박연미 기자

※광속도불변의 원리=등속도운동이나 정지상태의 관측자에게는 항상 빛이 같은 속도로 보인다는 원리. 특수상대성이론의 범위 안에서는 이보다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광속은 일종의 궁극과 통한다는 의미다.






2007-02-25 (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