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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능가하는 '포스', 두 얼굴의 조연

 

 
세상엔 두 종류의 배우가 있다. 연기 잘하는 배우와 연기도 못하는 배우. 물론 연기 못하는 배우는 얼굴은 잘 생겼다. 얼굴 뜯어먹는 재미라도 주지 못하면 그 혹은 그녀가 어떻게 배우를 하겠나?

최근 날리는 중견급 배우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그들이 얼굴이 아니라 기가 막힌 연기로 보는 이의 넋을 홀라당 삶아 먹게 한다는 거다. 그는 분명 주연이 아닌데, 주연을 능가하는 '포스'로 그 화면을 불태운다.

그가 나타나면 과자 부스러기를 집어삼키던 입과 손톱을 깎아대던 손은, 별 다섯 개 장군님께 "동작 그만!"이라도 당한 듯이 딱 멈춰버린다. 그가 나타나면 드라마는 푹 고아서 끓여낸 삼계탕 같은 기름기가 잘잘 흐르고, 갑자기 이야기는 불타오르며 내 넋을 앗아가 버린다. 최근에 과연 누가?

어머니와 고등어를 찜 쪄 먹을 두 얼굴, 김창완

 
▲ <하얀거탑>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김창완.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창완. <하얀거탑>의 김창완은 그가 그 동안 드라마를 한 게 그냥 허허실실 날로 묻어갔던 게 아니란 걸 증명한다.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김창완은 우유부단하고 순박한 아저씨였다. 그런 줄 알았다. 그는 연기를 했는데, 우리는 착각했다. 원래 저럴 거야. 그냥 하던 대로 한 게 마침 딱 맞는 배역을 만난 것뿐이야.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랬다. 그래서 그는 '연기하지 않는 연기자'란 소릴 들었다. 항상 눈에 힘주고 찡그리고 있는 게 다였고, 그거 하나로 버텼으니까.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에서 대사 많이 하는 거 봤나? 김창완도 그런 줄 알았다. 실생활이 연기고, 원래 그런대로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착각이었나. 그가 최근 증명했다(그 동안 좀 억울했겠다). 원래 평범한 인물 연기가 가장 어려운 연기라던가?

<하얀거탑>에서 만난 김창완은 허허실실 아저씨가 아니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며, 한밤중에 냉장고를 열었다가 어머니가 소금에 저려놓은 고등어를 발견하고 웃음 짓는 아저씨가 아니었다. '어리버리' 아저씨는 우주여행이라도 떠난 듯했다.

<하얀거탑>의 김창완이 연기한 명인병원 부원장은 그런 인간과 정반대 인간이다. 냉장고를 열어볼 리도 없지만, 혹시 냉장고를 열었다가도 '저 고등어가 저기 왜 있지? 누가 선물로 보낸 안동 간고등어인가? 아니면 금덩이가 들은 고등어인가?' 노련한 눈빛으로 가늠해볼 듯한 인물이다.

<하얀거탑>의 김창완은 속 보이는 청탁을 넣는 동창회장한테도 "나 그런 인간 아냐"하고 벌떡 일어서다가도 "너 부원장만 하고 말래? 원장 안할 거야?" 소리에, 지금껏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깐깐한 얼굴을 풀고 토라진 동창회장의 목을 친근한 척 껴안는 인간이다. 아무 때나 한결 같은 인간이 아니라, 돈이 따라오는 권력 앞엔 변신이 한결 같은 인간이다.

그게 김창완이다. 그런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권모술수에 절은 부원장 모습에 어찌나 능수능란한지, 자신의 오진을 들춰내는 바람에 욕보인 장준혁을 옭아매며 "웃기는 녀석이네." 소리 지를 땐, 소름이 쪽쪽 끼칠 정도다.

웃으면 반달을 그리느라 보이지 않는 눈은 여전하지만, 이젠 그 웃음이 순박하기보다 권모술수의 극치로 보일 정도다. 그는 그렇게 한 얼굴로 전혀 다른 두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이런 게 연기다. 좋은 연기란 이렇게 그 배우가 과거에 어땠는지 홀랑 잊게 만든다.

가가멜에서 명랑 속물 사모님까지, 양희경

 
▲ <달자의 봄>에서 무시무시한 가가멜 팀장으로 분한 양희경.
 
ⓒ KBS
 
양희경은 또 어떤가? <하얀거탑> 속의 양희경은 지금껏 그가 보여준 단골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반주한다. 명인병원 실세 부원장의 사모님을 맡은 양희경은 항상 생글생글 웃는다. 그 웃음은 가진 자의 웃음이고, 돈 밝히는 사모님의 전형이다.

돈 많은 사모님답게 샐쭉하기도 잘하며, 그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얄팍한 인간인데다,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속물이다. 비싼 그림 <바보 산수>를 앞에 놓고 '어머. 좋아. 어머, 좋아' 얼굴을 할 때도, 예술을 알아서라기보다, 비싼 그림을 걸어놓아서 무턱대고 좋아하는 단순 무식한 땅부자 사모님 같은 모습을 아쉬움 없이 보여준다. 지독한 속물 사모님 모습을 얄밉게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수요일과 목요일이면 양희경은 부원장 사모님과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달자의 봄>에서 양희경은 듬직한 여배우들이 맡기 일쑤인 사람 좋게 너털웃음을 웃는 아줌마, 덩치처럼 마음도 널찍한 아줌마가 아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속칭 '가가멜'이다. 과거 만화 '스머프'에 나와 악명을 떨쳤던 인물 '가가멜'이 드라마에서 그녀가 지닌 별명이다.

달자를 아끼는 직장 언니에 따르면, 이 팀장(가가멜)은 '한다 홈쇼핑'에서 그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는 막강 싸가지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녀를 만나면 어떤 직원도 한달 안에 울면서 뛰쳐나가고야 말며, 그녀가 사무실에 나타나는 낌새만 보여도 사람들은 얼른 하던 딴 짓을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일에 몰두한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귀신같이 사람들의 약점을 파헤치고, 단 한 마디 말로 상대방을 땅에 묻어버린다. 말의 톤은 항상 일정하고, 눈빛은 항상 사람들을 깔아뭉갠다. 속물이라기보다 속이 꽉 틀어 막혔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라곤 찾아볼래야 개미 콧구멍만큼도 안 보이는 인물이다. 얄팍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묵직한 인생관을 자랑하는 무게주의자요, 눈빛 하나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졸아붙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의 파이터다.

<하얀거탑>의 양희경이 "좋은 게 좋은 거지" 신념으로 돈관 권력 앞에 꼬리를 살랑대는 속물 봄바람이라면, <달자의 봄>의 양희경은 "나쁜 건 다 나쁘다" 신념으로 어떤 술수에도 두 다리가 꿈쩍하지 않는 고지식 대마왕 겨울바람이다.

<하얀거탑>의 양희경이 까르르 까르르 웃는 부잣집 사모님 '원단'이라면, <달자의 봄>의 양희경은 웃을 줄은 알까 싶은 까칠함의 원조인 B사감 '원단'이다.

박찬욱 감독 말마따나 "좋은 배우는 뭘 해도 어울린다". 진짜 연기가 뭔지 보여주는 이들이 있어 드라마가 즐겁다.





2007-02-02 (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