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드라마 시대의 배우론
“자, 시작합시다.” 그 남자가 메스를 집는 순간, 수술은 시작된다. 잠시의 느슨함도 허용될 수 없는 수술실. 그 긴장감속에서 그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손놀림으로 수술을 집도한다. 경이적일 정도의 기술과 마인드컨트롤. 그러나 MBC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에게는
수술이 가장 편안한 일일 것이다. 수술실을 나서면 수술보다 훨씬 복잡한 일들이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다. 외과 정교수는 어떻게 해야 될 수
있지? 시골에 홀로 사는 어머니는? 장인이 눈치를 챈 불륜 상대와의 관계는? 집이든 직장이든, 그가 마음 놓고 쉴 곳은 없다.
배우 김명민은 한국 드라마의 어떤 경향이다
안판석 감독의 말대로 <하얀거탑>은 “병원 의사들이 정치하는 이야기”지만, 동시에 장준혁을 통해 투영된, 명인 대학병원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때마다 고도로 복합적인
‘정치행위’를 해야 한다. 장준혁은 수술을 하는 그 순간에도 수술이 자신의 처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수술을 누가 와서 참관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의술에만 매진하는 최도영(이선균)도, 장준혁의 스승이었다가 적으로 돌아선 외과 정교수 이주완(이정길)도 마찬가지다. 한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얽혀있는 복잡한 인생에 대한 큰 지도. 그것은 <하얀거탑>이 주인공 위주로만 흘러가던 기존 멜로드라마와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 중 하나고, 김명민이 <하얀거탑>의 장준혁이 된 것은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어떤 경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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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 일대기가 아닌 대하드라마로 성공할 수 있었던 <불멸의
이순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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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엮어가는 캐릭터 드라마
<불량가족> | |
김명민에게 KBS 연기대상을 안겨준 KBS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이 나라를 구하는 과정은 곧 이순신, 그리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고, ‘성웅 이순신’의 캐릭터와는 180도 달랐던 후속작 SBS <불량가족>의 조폭 달건 역시
의뢰를 받고 급조한 가짜 가족들을 쉴 새 없이 관리하고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불멸의 이순신>은 한 전쟁 영웅의 활약상에
그치지 않고 이순신을 죽는 그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편안할 수 없는 장수로 만드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는 대하드라마의 풍모를 가질 수
있었고, <불량가족>은 단지 조폭과 생활력 강한 여자 양아(남상미)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벗어나 다양한 캐릭터의 에피소드를 풀어나가는
캐릭터 중심의 작품이 됐다.
캐릭터가 작품의 무게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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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이야기들은 결국 그를 중심으로 모이고 그는 열쇠를 찾아낸다
(<소름>의 용현) | |
김명민은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에서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이게 만드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가지 속성 사이에서 흔들리며 고뇌하는 어떤 인간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를 연기자로
확실히 각인시켜준 영화 <소름>부터, 그는 언제나 선과 악, 강과 약, 이성과 감성 등 인간의 이중성 사이에서 언제나 불안하게
흔들렸다. <소름>의 용현은 평범한 하류층 청년의 모습 뒤에 상상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며 그가 사는 아파트 사람들의 모든 비밀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고,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그가 연기한 재벌 2세 역시 여느 재벌 2세들과 달리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
때문에 언제나 불안하고 갈등했다. 그가 연기를 하면 이순신도 우리가 알고 있는 굳건한 의지의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진 구국에 대한
무게감과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는 외로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이순신이 됐고, 전형적인 캐릭터일줄 알았던 달건같은 조폭 캐릭터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때론 우울해 하고, 자신에게 첫 번째 가족이 되어 준 조직과 새로운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재탄생했다. 그런
캐릭터의 불안하고 인간적인 면모는 그에게 걱정거리를 더 안겨주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을수록 더 빛을 발하고, 그런 갈등 끝에 보여주는
김명민 행동은 시청자에게 긴장감을 선사한다.
대하사극이든 조폭 코미디든, 또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건 메디컬 드라마건 간에 김명민이 출연한 드라마에는 늘 어떤 진지함과 무게 같은 것이
얹혀 있었으며, 이야기의 전개는 보다 복잡해질 수 있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은 자신의 명줄을 쥐고 있는 병원의 실세 우용길
부원장(김창완)의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계속 고민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해나가고, 그것은 등장인물 모두에게 새로운 영향을 끼친다. 장준혁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하얀거탑>은 한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복잡한 작품으로
변해 간다.
캐릭터의 존재감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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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민은 변화하는 TV 드라마가 발견해낸
'배우'다 | |
한국 드라마가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대신 멜로가 배제된 메디컬 드라마를 만들게 되고, 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질 지에만 초점을 맞췄던
단선적인 스토리를 벗어나는 순간, 드라마 제작자들은 김명민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 드라마의 변화다. 노희경의 드라마와 MBC <네
멋대로 해라>가 드라마 속에 일상을 찾아주고, MBC <다모>가 영화 같은 스케일과 영상의 감각을 추구한 뒤, KBS
<부활>을 기점으로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장르 드라마들은 보다 과거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화려한 이목구비의 젊은 스타들이 아니라 김명민처럼 ‘흔들리는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력과 일상의 얼굴을 모두 가진 배우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크고, 복잡한 이야기일수록, 캐릭터에게 무게감이 실리면 실릴수록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배우. 한국 영화가 <쉬리>부터
<괴물>에 이르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들면서 송강호와 같은 배우들이 흥행의 정점에 서게 됐듯, 김명민은 한국 드라마가 대중적인 코드
안에서 더욱 복잡하고 잘 짜여진 ‘웰메이드’를 지향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큰 작품에는 큰 스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큰 이야기를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 늘 고민 속에서 사는 배우가 그 고민에 걸맞는 세계를 만나기 시작했다.
2007-01-15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