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   커

문지기 특파원 드디어 공민왕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정치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공민왕 이전에 개혁군주가 충선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문지기

무인시대로부터 떨어져 버린 500년 고려 왕조의 왕권은 미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왕권이라는 절대 권력, 절대 질서의 약화는 부원배들이나 권문세가와 같은 기존의
기득권층들의 횡포로 이어져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공민왕 이전 왕권강화를 통해 시대를 개혁 하시려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공민왕의 할아버지이자 기황후와
손을 잡고 고려의 왕이 되려고 하는 덕흥군의 아버지인 26대 충선왕이십니다.
충선왕은 중국 강남(江南)의 중봉명본(中峰明本)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도 하고,
중국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차려놓고 서예와 그림으로 유명한 조맹부 같은 원나라 제일의 문사들과 이제현 같은 고려의 사대부들간에 교류를 주선하기도 했던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충선왕은 세자시절 처음으로 개혁정치의 깃발을 드셨는데요, 원나라에서 귀국한 충선왕은 25대 충렬왕을 '대리청정(代理聽政)'하면서 개혁을 수행하자 원나라의 수탈과 권문세족들의 전횡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충선왕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세자가 왕을 뵈러갈 때
백성들이 길을 막으며 말을 둘러싸고는 원한을 호소하였으므로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세자가 모두 받아주었으니 이는 대개 권세가들이 남의 민전을 탈취해도 유사(有司)가 능히 청단(聽斷)치 못한 까닭이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앵   커

문지기 특파원 방금 '대리청정(代理聽政)'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대리청정(代理聽政)'과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어떻게 다른가요?

문지기

대리청정(代理聽政)'은 보통 왕이 중병에 들어 정사를 살필 수 없거나, 노년에
격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또는 국난을 당하여 세자에게 위임통치를 시키던 것이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입니다. 충선왕의 개혁은
백성의 환호 속에 시작되었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좌절되고, 개혁 대상인 권문세족들의 집요한 저항 때문에 원나라로 쫓겨나게 됩니다. 권문세족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안고 원나라로 쫓겨간 충선왕은 3년 후 충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면서 다시
개혁작업을 시작합니다. 충선왕은 27조에 달하는 즉위조서에서 개혁대상인
권문세족을 '세가(勢家)' 또는 '호활(豪猾)의 무리'라고 강력히 비판하면서 박전지, 오한경 등의 4학사를 개혁의 주체로 기용하였습니다. 이들 4명의 사대부는 권문세족과는 사상이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들의 기용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무렵 고려에는 홍자번(洪子藩)이라는 매우
개혁적인 재상이 있었지만, 홍자번(洪子藩)은 충렬왕에게 지방수령 등 관리의
비정과 공역(貢役)의 폐단 등을 담은 폐정 개혁안인 '편민(便民) 18사(事)'를 제시해 진재상(眞宰相)이라 불릴 정도로 칭송을 들었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개혁정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홍자번(洪子藩)의 신분이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에
권문세족 출신의 양심적 관료인 그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개혁대상은 지방의
수령이나 아전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본질이 아닌 지엽에 집착한 개혁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앵   커

인간이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포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군요.

문지기

충선왕이 권문세족과는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사대부를 개혁주체 세력으로 기용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두 번째 개혁도
8개월만에 좌절되고 말았는데요, 개혁대상인 권문세족들이 또다시 원나라의 힘을
빌려 충선왕을 용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후 10년 후에 다시 즉위하지만 두 번의 좌절을 겪은 탓인지 이번에는 그다지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충선왕은 이후 원나라의 황위계승 분쟁 등 복잡한 원의 정세에
개입했다가 다시 원나라로 끌려간 후 머나먼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고, 그와 함께 개혁을 추진했던 사대부 이제현이 1323년 연경에서 그 머나먼 토번(지금의 시짱
자치구[西藏自治區] 산난 지구[山南地區])의 유배지까지 찾아가는 발걸음은 실패한 개혁주체의 비장한 동지애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호문애민(好文愛民)의 군주였던
충선왕의 개혁 실패는 한 가지 교훈을 던져주는데요, 개혁은 개혁대상의 사상을
압도할 개혁이념과 이를 수행할 개혁주체세력이 강력하게 형성돼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앵   커

공민왕도 할아버지 충선왕이 이와 같은 개혁정치를 펼치다 실패한 이야기를
알고서 신진사대부중에서 개혁의 주체를 찾지않고 신돈과 같은 미천한 인물을
개혁 정치의 동지로 삼았는지도 모르겠군요. 문지기특파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