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 <태왕사신기>의 유승호
“그대의 충성심을 하늘에 맹세할 수 있겠는가?” 소년 왕은 외쳤다. 목소리를 높였지만 표정은 복잡하고 눈빛은 흔들렸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위를 물려받으며 궁에 들어왔지만 대비의 치마폭에 감싸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적으로 여겼던 자가 찾아와 충신임을 자처할
때의 혼란과 체념.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으나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의 무게. <왕과 나>에서 유승호가 연기하는 성종의 어린
시절은 일찍부터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로, 그리고 배우로 살아가야 하는 아역 배우들의 삶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소년의 얼굴에서 제왕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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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집으로>,<마음이>와 드라마
<태왕사신기>,<왕과
나>(시계방향으로) | |
그래서일까. 영화 <집으로> 이후 5년, 어느새 열다섯이 된 소년은 또래답지 않게 눈빛이 깊다. 모처럼 촬영이 없는 날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인터뷰를 하러 달려와야 했음에도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쉽사리 말문을 열지 않는 대신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이야기한다. “이번엔, 왕이죠.”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김명민의 아역을 연기했지만 <왕과 나>에서의 사극 연기가 유독 어려웠던 이유도 이 한 마디로
설명한다. “왕은 대궐 안에서만 사는 사람이고, 말투나 걸음걸이같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평민이랑 다르거든요. 나이에 비해서 위엄 있어 보여야
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하지만 이 차분한 소년의 귀티 어린 얼굴로부터 제왕의 풍모를 먼저 읽어낸 것은 감독들이다. 공교롭게도 <왕과
나>와 방영 시기가 겹치긴 했지만 작년 5월부터 올 6월까지 1년에 걸쳐 촬영한 <태왕사신기>에서도 유승호는
광개토대왕(배용준)의 아역 담덕을 연기했다. “그래도 <태왕사신기>는 환타지 사극이다 보니까 대사 톤이 현대극에 가까워서 조금은 덜
어려웠어요.” 두 왕 사이를 오가는 8년차 배우다운 분석이다.
하지만 세 편의 영화와 여러 편의 드라마를 통해 어지간한 성인 배우 못지않은 경력을 쌓은 지금도 여전히 연기는 힘들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눈물연기나 감정 신이 아니다. “밝은 거, 기분 좋아서 하하 웃고 그러는 게 더 어려워요. 슬픈 건 감정을 한 번 몰입시키면 얼마든지 갈 수가
있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즐겁게 연기하려면 어색해요. 촬영하고 나서 봐도 그렇고.” 다시 생각해도 괜히 멋쩍은지 씨익 웃는 이
소년이 <부모님 전상서>에서 실감나는 자폐아 연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슬픈 연가>에서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손바닥으로 비를 가려주는 모습을 통해 ‘누나팬’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열다섯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유승호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연기만이 아니라 다른 공부를 하고, 되도록 좋은 사람만 만나고, 운전을 배워서 여행을 떠나는 게 어른이
되고 나서 할 일로 생각해놓은 것의 전부지만 그에게 ‘어른’은 ‘자유’와 동의어이면서 새로운 연기를 보여 줄 계기인 모양이다. 액션 연기를
해보고 싶지 않냐는 물음에 “어른 되면요. 운동을 더 잘하게 되면”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던 유승호가 불현듯 심각해진다. “그런데
그것보다 <왕과 나>를 찍으면서 전광렬 선생님처럼 연기하고 싶어졌어요. 선생님은 대사 안하고 가만히 계셔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데 저는
꽥꽥 소리를 질러도 그게 안되거든요.” 중년의 연륜을 부러워하는 것마저 소년의 특권임을, 아직은 모를 때다.
(글) 최지은 guilty@t-fac.com
(사진) 이원우 mcqueen@t-fac.com
2007-09-12
(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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