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강력한 군주제를 기반으로 개혁을 주도하며 조선 후기 중흥시대를 이끈 임금이다. 국왕이면서 스승인 군사(君師)를 자처할 정도로 당대의 석학이었으며 수십 차례 잠행과 거리 능행을 즐길 만큼 백성과 한 몸이 되기를 원했던 왕이다.
또 정조는 당론만이 모든 것의 우선이 되는 상황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하는 시파와 자신을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목숨을 위협 받았을 만큼 정치적 혼란기 속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즉위 초 자파의 국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을 시해하려는 암살단이 궁내에 난입하는 등 성공하지 못한 모반만 수차례 일어났다.
이 때문에 정조는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조선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 특별한 군주가 됐다. 공론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체계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개방된 사회로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개혁 세력을 창출해 내려 했던 정조의 정치가적 면모는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됐다.
3일 방송된 MBC 월화사극 '이산'의 48회 방영분에서 등장한 규장각과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출신 학자들은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펴고자 했던 개혁군주 정조 이산(이서진)의 핵심적인 근위 세력이었다.
정조가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을 보관하는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 왕조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만백성에게 보여 왕에 대한 충성심을 관리하고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戚里)·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는 한편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문정치를 실행할 우수한 관리들을 길어내기 위함이다. 즉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규장각 설치는 왕권 강화를 위한 행보인 것이다.
때문에 1776년 설치된 규장각은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학문중심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한다는 정조 시대 문화정치를 이끈 실학파, 북학파 학자들도 규장각을 기반으로 배출된 인재들이다.
특히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서얼 자체를 없애기 위해 서얼허통절목을 공포, 경직된 신분제를 완화하고 신세계를 염원한 급진 개혁가 박제가, 유덕공 등을 파격 등용한 것은 역동적인 사회 변화를 꾀한 정조의 개혁의지를 드러내는 단면 중 하나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정조의 배려 아래 규장각에 유치된 박제가 등 서얼들은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며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리고 청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다.
비록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사상이 명에 대한 사대, 낡은 관습이나 제도 따위에 얽매여 있던 사대부 권력층과의 잦은 충돌로 이어지며 정조의 죽음 이후 미완의 개혁으로 남게 되지만 양반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전 백성을 아우르는 정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꽃피우게 한 원동력이 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은영 helloey@news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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