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마음의 풍금> <춘향뎐> <혈의 누>의 민언옥 미술감독이 드라마 <궁>으로 1회 서울드라마어워즈 미술상을 수상했다. 장르를 넘나들며 영상미술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민언옥 감독을 만났다.

서울드라마어워즈는 국내 드라마는 물론, 해외 드라마까지 모아 후보작을 선정하고 그중 좋은 작품을 가려 수상하는 에미상과 같은 상이다. 올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 상은 방송사별로 집안잔치에 그쳤던 그간의 드라마 시상식을 하나로 합쳤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춘향뎐>으로 대종상 미술상을, <혈의 누>로 춘사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미술상을 석권한 민언옥 감독은 드라마 <궁>으로 이 첫 번째 드라마어워즈 미술상까지 거둬들였다.

상복이 많은 것 같다. 영화도 하는 작품마다 수상을 하지 않았었나?
영화는 워낙 몇 편 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웃음) 하지만, 드라마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처음 미술 일을 시작한 게 MBC미술부에서였고, MBC미술센터까지 합치면 방송사에서 일한 시간만 15년이 되는데 그간 한 번도 TV프로그램으로 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요즘엔 일 안하고 놀러만 다녔는데, 상 받을 때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부끄럽다.

<궁>이 끝난 후 어떻게 지냈나?
놀았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는데 <궁>이 끝나자마자 너무 여행을 가고 싶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프로덕션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는데 1학기가 끝나는 6월만을 기다려서 여름방학 내내 뉴욕에서 지냈다. 뉴욕 시에서 박물관 옆에 있는 아파트를 하나 빌려서 두 달간 머물렀는데, 잠을 얼마나 많이 잤는지 모른다. 낮에는 자고, 쉬고, 생각나면 바로 옆 박물관 가서 구경하고 그러다가 밤엔 사람 사는 거 구경하러 사람들 모이는 장소에 나가곤 했다. 그러고 나니 돈이 다 떨어졌다. <궁>으로 상을 탄 후 주변에서 사람들이 한턱 쏘라고들 하던데 지금 나한텐 상금으로 받은 돈 500만 원이 전부다. 일 열심히 해서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 사람이 500만 원 겨우 번 나보고 밥을 사라니 너무들 하지 않나. 너무 노니까 이제 나도 일하고 싶다. 제발 일거리를 주셨으면 좋겠다. (웃음)

방송으로 미술에 입문했다고 들었다. 영화에는 어떻게 입문하게 됐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TV에 나오는 쇼 프로그램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막연히 저런 무대를 꾸며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MBC미술부에 원서를 냈는데 취직이 됐다. 미술부에선 처음엔 쇼 프로그램 무대 일을 주로 했었고, 그러다가 경력이 붙으니까 단막극, 그 다음엔 주말극, 그리고 미니시리즈 등 드라마 일을 주로 했었다. 일주일에 서너 편씩 했으니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지금은 그때 했던 작품들 잘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렇게 지내다가 미술부가 MBC미술센터로 커지면서 영화미술까지 하게 됐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영화 쪽 일을 맡게 됐다.

같은 프로덕션 디자인이더라도 영화와 방송은 많이 다를 것 같다.
호흡과 리얼리티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호흡은 영화가 훨씬 길고, 무언가 생각해서 정해놓고 갈 수 있다. 반면 방송은 그때 그때 나오는 대본에 따라 대응해야 해서 호흡이 짧게 간다. 이건 아마도 미술뿐 아니라 연출하는 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얼리티라는 측면에선 영화가 훨씬 허용범위가 넓은 것 같다. 드라마는 정말 일상적인 공간에서 틀어 놓고 보다가 금세 채널을 바꾸고 그러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작다. 반면 영화는 불 꺼진 곳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집중해서 보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실험을 할 수가 있는 것 같다.

드라마 <궁>의 미술은 전형적인 TV 드라마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화에 가까웠다.
<궁>은 프리프로덕션 과정을 거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사전제작이 많이 진행되지 않아서 그때 그때 즉석에서 대응해야 할 것들이 있긴 했지만, 제작에 들어가기 전 연출을 맡았던 황인뢰 감독과 상의하면서 주요 세트장들을 만들어놓을 수 있었다. 세트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미술 측면에선 중요한 부분은 사전제작 한 거나 다름없었다.

<궁>은 과거에 있었던 공간도, 현재에 있는 공간도 아닌데 어떻게 구상했나?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난 어떤 공간을 상상하고 그 안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 텍스트를 많이 수집한다. <궁>은 왕궁에 살았던 사람들 사진을 수집했었다. 왕, 내관, 귀족들, 나인들 이런 사람들 사진을 수집해서 보고, 그 표정들을 보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는 거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궁>이 ‘죽은 아이 살리기’ 프로젝트라는 거였다. 조선 말기 궁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서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자의에 의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외세에 의해 단숨에 그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 아닌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 사람들이 지금 현재에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했다. 우선 사람들을 생각하고, 캐릭터에 맞는 의상 컨셉을 잡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공간을 생각해냈다.

의상을 먼저 생각했다고?
난 프로덕션 디자인에서 의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있는 이 작업실이라는 공간도 나를 표현해주겠지만, 난 나를 표현하는 게 이 공간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다. 내가 편안함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이 티셔츠는 단숨에 알려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의상은 의상팀이 따로 있지만, 전체적인 의상 컨셉을 잡고 그러는 건 함께 이야기하고 상의해서 정한다. 물론, 컨셉만 정하면 의상팀에서 세부적인 건 다 맡는다. 프로덕션 디자인이란 무대나 세트장을 창조하는 것뿐 아니라, 의상과 조명 등을 포함한 모든 시각적인 요소들을 통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궁>의 디자인은 <혈의 누>와는 상당히 달랐다. 다른 사극들에 비해 꽉 짜인 느낌이었다.
<궁>은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과거의 공간이 현재에 있어야 하는. 그런 충돌하면서도 조화로운 공간을 표현하는 데 여백이라는 게 많이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유독 사극 장르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내가 SF를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SF 장르가 거의 없지 않나. 사극은 내겐 SF다. 현재 내가 있지 않은, 상상을 해야만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SF와 사극은 같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느냐, 미래로 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혈의 누>의 경우는 영화에 등장하는 제지소나 그런 곳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상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다. <궁>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사극에 끌리는 것 같다.

여행을 통해 작품의 컨셉 등을 구상하나?
아니다. 여행은 그냥 좋아서 하는 거고. 작품에 들어가면 혼자서 조용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같이 작업하게 될 감독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구상하기도 한다.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게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색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감독이 의도한 영화를 충실히 표현해내야 하는 작업 아닌가. 음악을 듣다보면 그 감독의 색깔을 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생각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 편은 아니다. 방송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오랫동안 구상하는 버릇이 안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조만간 영화를 하나 시작하려 하고 있다.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아니고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번엔 사극이 아닌 좀 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긴 하다. 뮤지컬영화도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연극 무대미술도 해보고, 방송사에서 일할 때도 무대 쪽 일을 많이 했으니, 영화와 무대 두 가지를 접목시킨 장르를 해보고 싶다. 한국에 뮤지컬영화가 거의 없어서 언제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