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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손현주 I 손현주와 네박자

“성공했네.” 한강이 보이는 베란다가 있는 초호화 아파트에서, MBC <여우야 뭐하니>의 병각은 그렇게 말한다. 한때는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팔다가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아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는 거부가 됐고, 덕분에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믿는 남자. 이쯤 되면 KBS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성공담이지만, 정작 그는 가지고 싶은 ‘지적인 여자’의 마음은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엔 그는 책을 잔뜩 살 수는 있어도 읽지는 않는 남자고, 옷 한 번 사는 데 수억을 쓸 수는 있지만 그 옷에 어울리는 교양을 가지진 못한 남자니까.

돈 많아도 쓸쓸한 소시민적인 중년 남자의 초상

 
그래서 <여우야 뭐하니>에서 병각과 준희(김은주)가 사귀는 과정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리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여자를 사로잡을 만한 다른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닌 병각이 준희에게 접근하기 위해 돈과 권력의 힘을 발휘하는 모습은 오히려 추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리 돈을 벌었어도 속되고 속된 소시민 중년 남자의 모습. 병각은 늘 꿈같은 로맨스를 보여주곤 했던 재벌 2세를 정반대로 뒤집어놓은 캐릭터다. 돈과 외모와 심지어 진심까지 가진 재벌 2세는 없다. 만약 중년의 나이에 재벌이 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병각처럼 자신의 돈과 권력을 이용해 접근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손현주에겐 멋진 재벌과 모델의 아름다운 로맨스는 좀처럼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스스로의 말처럼 ‘요즘 젊은 배우들보다 얼굴도 큰’ 그가 스무 살쯤 어린 모델과 사랑에 빠질 때, 그의 캐릭터는 멜로가 아닌 코믹용이 된다. 이런 병각을 통해 손현주는 돈은 많으나 쓸쓸한 한 소시민적인 중년 남자의 초상을 보여준다. 아무리 품위 있는 척해도 과민성 대장염 때문에 아무 때나 방귀를 뀌고, 고급 와인을 좋아하는 척해도 결국엔 갈비를 뜯는 게 어울리는 남자. 손현주는 그렇게 늘 소시민이 한 번쯤 꿈꿔볼 법한 인생과 그 인생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연결시켰다.

이 남자 나쁘다, 하지만 불쌍하다

<앞집 여자>
<장밋빛 인생>

장진 감독의 영화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에서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자신이 누명을 벗겨내는 대신 그에 대해 이렇다 할 변명도 제대로 못하는 소심한 회사원이었고, MBC <앞집 여자>의 상태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예쁜 여자와 불륜에 빠졌지만, 그 사실을 아내에게 들키자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싹싹 비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또 KBS <첫사랑>의 주정남은 백치에 가까운 여자 찬옥과 가슴절절한 순애보를 이어갔지만 그럼에도 그는 멋있는 남자이기보다는 여전히 어눌한 남자였을 뿐이다. 손현주는 종종 중년 남성들이 꿈꿔볼 법한 판타지에 빠졌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판타지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판타지를 버거워하는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앞집 여자>처럼 바람도 피우지만 아내에게 들켰을 때는 그게 큰 죄가 된다는 건 알고 있고, <장밋빛 인생>처럼 불륜 상대와의 결혼을 위해 아내에게 이혼을 강요하면서도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눈물을 흘리는 남자. 그래서 손현주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일종의 구원을 받는다. 독특한 상황에 빠진 소시민 남자는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적인 동정심을 얻어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받는다.

일일 드라마의 일상성과 트렌디 드라마의 판타지 사이

<여우야 뭐하니>에서 병각의 행동이 이해될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위악적인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쓸쓸함과 아픈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병각이 순박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애증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 남자가 된다. 그것은 손현주가 어느 때이건 순박하고 어눌한 소시민의 표정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장밋빛 인생>에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반성문의 캐릭터는 여간해서 이해받기 힘들다. 그러나, 손현주는 아내를 때리는 그 순간에도 악한의 표정 대신 약간은 뭔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무언가 상황에 밀려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귀 얇은 소시민 남자. 그것은 반성문이 아내의 병을 알게 된 뒤 아내의 병 치료를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 모습과 연결된다. 결코 쉽게 용서할 수는 없지만, 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 모습이 불쌍해서라도 용서하게 되는 독특한 느낌. 이를 통해 손현주는 드라마적인 설정이 주는 재미와 소시민의 삶이 주는 공감을 절묘하게 연결시킨다. 그것은 그가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통해 오히려 각광받은 이유다.

 
드라마시티 <기억이 사랑에게 묻다>
그저 소시민적인 캐릭터일 뿐이었다면 그는 KBS <바람은 불어도> 이후 계속 그런 캐릭터로만 소비될 것이었고, 단지 개성이 강한 캐릭터였다면 그의 재능은 영화를 통해 보다 잘 발휘됐을 것이다. 하지만 손현주는 자신의 캐릭터를 안전하게 복제하는 대신 그 소시민이 위악적으로도, 혹은 로맨스의 주인공으로도 변할 수 있는 상황에 자신을 집어넣음으로써 일일 드라마의 일상성과 트렌디 드라마의 판타지, 혹은 최근 등장하기 시작한 30대 이상의 중년 시청자들을 위한 트렌디 드라마에 현실적인 색채를 불어넣을 수 있는 그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손현주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죄는 지었으되 그 소시민적인 모습으로 인해 용서받듯, 손현주는 어떤 순간에도 소시민의 느낌을 잃지 않는 연기로 일일 드라마와 아침 드라마를 건너 미니시리즈의 주연급 배우가 됐다. 물론, 그가 이것을 성공이라고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병각처럼 손현주 역시 집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성공했네”라고 충분히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병각처럼 쓸쓸한 독백이 아니라 ‘있는 척’ 안 해도 충분히 성공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글) 강명석 ( <매거진t>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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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30 (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