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양성희]
커피전문점을 배경으로 한, 씩씩한 남장 여자(윤은혜)와 쿨한 재벌 2세(공유)의 로맨스다. 30%대 시청률에 육박하며 인기를 끌었다.
‘커프’는 의외의 발견 같은 드라마였다. 남장 여자라는 설정 외에는 뻔한 구도였지만 매력적인 캐릭터, 사랑스러운 에피소드, 맛깔스러운
대사로 흔한 멜로드라마의 전형성을 깼다. 로맨스물의 주 소비층인 젊은 여성들의 기호와 욕망, 판타지를 정확히 꿰뚫은 드라마이기도 했다.
‘커프’의 성공을 통해 요즘 대중문화의 흥행 코드를 살펴본다.
# 현실을 지워라. 판타지로 질주하라=‘커프’는 순도 100%, 고농축 로맨틱 판타지다. 극적인 전개, 특별한 사건보다 사랑의 순간에
느끼는 설렘, 짜릿함을 극대화했다. 연인들의 장난, 사소한 몸짓, 키스할 때 절로 눈이 감기고 다리가 풀리는 장면을 마치 순정만화에서처럼 한 컷
한 컷 나누어 잡아냈다.
‘커프’는 또 사랑의 현실적·물질적 조건을 작정하고 지워버린 후, 순수한 판타지로 일관했다. 생계 때문에 남장을 한 소녀가장과 재벌2세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통 멜로드라마가 사랑으로 이런 현실을 극복한다면, ‘커프’는 그런 현실 따윈 애초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전제하는 식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청자들의 태도다. 기꺼이 비현실의 판타지에 동승했다. 재벌2세 한결(공유)이 집에서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이 나와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식이다. 이들에게 판타지는 리얼리즘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저 꿀꿀한 삶의 출구로 받아들여졌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소비할 뿐 드라마에서까지 구질구질한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는 태도다.
# 예쁜 남자들을 전시하라=‘커프’에서 시각적 볼거리로 전시되는 것은 남성들이다. 공유는 근육질 몸매와 큰 키, 귀여운 표정,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여성 팬들을 열광시켰다. ‘톰보이’ 윤은혜는 미소년의 중성적 매력을 발산했다. ‘프린스’ 3인방으로 불리는 종업원들도 모두 예쁜
남자들이다. 상반신을 노출하거나 흰 셔츠 차림으로 물에 빠지고 땀에 흠뻑 젖는 것도 남자들이었다. 그간 드라마들이 주로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그려왔다면, 이제는 거꾸로 남성들이 성적으로 대상화·소비된다는 뜻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며 성적 주체로 부상하는 여성 시청자들의 존재가
반영된 결과다.
# 성적 경계를 탐험하라=‘커프’의 공간은 성적 경계가 무너지는 공간이다. 곱상한 외모에 섬세한 프린스들만이 있는 커피숍이라는 설정부터
다분히 동성애 코드다. 미소년 남장여자와 꽃미남의 로맨스는 ‘게이 로맨스’ ‘야오이(남자 동성애를 일컫는 일본어)’ 코드로도 읽혔다. 그간
팬픽(팬들이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주로 등장하며 10대 소녀의 하위문화로 자리잡은 ‘야오이’코드가 점차 주류 상업 문화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결말은 남장여자의 커밍아웃과 이성애 커플의 해피 엔딩이다. 그 때문에 동성애 코드를 이성애의 극적인 장치로 활용한 ‘사이비 퀴어
로맨스’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여자든 남자든 인간적으로 끌리는 게 중요하다”는 대사처럼, 고정된 성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유형의
로맨스들을 담아냈다.
남장여자라는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동성애 코드가 흥행의 주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은, 동성애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관대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계는 여전하다. 이때의 동성애는 오직 ‘예쁜 남자들끼리만의
사랑’이라는 점. 동성애가 새로운 유형의 성적 판타지로 소비될 가능성이다.
# 솔직한 연애술사들=‘커프’의 연인들은 모두 감정에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로맨스의 주된 갈등 요소인 오해, 망설임, 뻔한
엇갈림이나 이해타산은 없다. 양다리에 사각관계까지 불사해도 상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예전 같으면 여러 남자와 동시에 관계를 유지해
‘여우’ ‘악녀’로 불렸을 유주(채정안)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어장 관리의 달인’이란 별명과 함께 고도의 연애술사로 평가받는다.
말하자면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표현하는 것이 ‘커프’식 사랑법이다. 사랑에 장애가 생겨도 용감하고 담백하게 돌파한다.
‘신파’와는 거리가 먼 ‘쿨’한 사랑법이다. 솔직함이라는 무기와 함께 최대한 연애의 즐거움을 누리자는 모토다. 결혼 외 임신, 동거 등도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 귀여움을 찬미하라=이들은 모두 유아적 세계에 산다. 결혼에 골인하는 한성(이선균)·유주 정도가 예외다. 한결은 아직도 장난감을 갖고
놀고, 레고 블록으로 가득 찬 비밀의 방을 가지고 있다. 한결과 은찬(윤은혜)은 에로틱한 긴장보다 사춘기 연인의 풋풋한 로맨스를 나눈다. 그 외
‘프린스’ 3인방과 홍사장(김창완)에 이르기까지 ‘커프’에는 진짜 어른 남자가 없다. 성인 남자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질서에 훼손되지 않은,
소년소녀의 세계에서나 존재함 직한 사랑의 원형질. ‘커프’가 보여준 것은 이런 순수한 사랑의 환상인 것이다.
귀여움 혹은 귀여운 남자에 대한 찬미는, 영원히 성장을 거부하는 피터팬 신드롬과 맞닿아 있다. 유아기에 머물려는 퇴행적 정서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무한경쟁이 강요되는 기성 질서에 대한 항변의 뜻이 강하다. 여성의 시각에서는 마초적 공격성이 없는 남성상에 대한 선호이기도 하다.
양성희 기자
패셔너블 공유, 프린스 3인방 ‘떴다’커프가 탄생시킨 스타들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귀여운 남장여자 은찬을 연기한 윤은혜는 ‘궁’에 이어 유쾌하고 만화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대표 배우로 자리 잡았다.
아직 일부 대사 처리의 미흡함이 눈에 띄지만, 가식 없고 씩씩한 소녀를 연기하기에 그만 한 배우가 없다는 평가다.
공유는 ‘커프’가 발견한 최고의 스타다. 장난기 넘치고 쿨한 연인 최한결 역으로, 그간의 정체에서 벗어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극중 선보인 세련된 패션과 함께 최고의 패션 아이콘으로도 떠올랐다. 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며 갈등하는 중반부 이후, 섬세한 감성 연기가
한껏 물이 올랐다는 평이다. 이정아 작가는 “공유는 내가 상상했던 한결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프린스’ 3인방의 대표 진하림 역의 김동욱도
인기 급상승 중이다.
흥행 파워를 과시한 이윤정PD와 이정아 작가도 주목 받고 있다. 이윤정PD는 MBC ‘베스트극장-태릉선수촌’으로 주목 받았던 신예다.
여성주의적이라기보다 로맨스 매니어다운 연출과 함께, 신인답지 않은 역량을 선보였다. 이정아 작가는 ‘커프’의 원작을 비롯해 최근 종영한 KBS
‘경성스캔들’의 원작 ‘경성애사’ 등 다수의 히트작을 발표한 로맨스 전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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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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