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부터 시작될 촬영을 이틀 앞두고 7차례의 수정을 거친 최종 대본이 나왔다. 6차례 수정이 가해지는
동안의 제목은 ‘아주 익숙한 함정’이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에 얽매여 현실의 행복을 놓쳐버리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습성을 빗대어 표현한 제목. 사랑과 기억의 간극에서
방황하는 세 주인공들을 표현한 드라마에 적확한 표현이긴 한데, 어찌 쉽게 와 닿는 제목은 아니었다.
최종 대본을 인쇄소에 맡기기 5분전에 연출 김도훈
선배가 내게 한 말.
“병길아. ‘빗속의 여인’은 어떠냐? 극중에서 윤화 아버지 18번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여러번 부르잖아. 또 빗속의 여인을 잊지
못한다는 가사가 우리 주인공들의 내면과도 적절하게 들어 맞구...”
‘빗속의 여인’이 큼지막하게 쓰인 대본은 그 날 저녁 배달되었다.
5월 18일 일요일
윤화(수애)와 상현(김태현)이
근무하는 병원 로케이션 촬영이 있었다.
촬영 내내 드라마 예고에 사용할 음악 생각에 빠져있었다.
드라마는 연출의 작품이지만, 예고는 전적으로 조연출의 작품이다.
어떤 장면, 어떤 음악, 어떤 효과를 사용하든 모든 권한과 책임은 조연출에게 있다.
나는 내가 직접 만든 음악을 예고에 사용하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아직 530화 ‘올 댓 라면’ 한편에만 사용해봤을 뿐이지만...)
이번 536화를 준비하면서도 대본 수정 작업 중 틈틈이 음악 작업을 마무리해 놓은 상태인데, 제목이 ‘빗속의
여인’으로 확정되면서 음악을 ‘빗속의 여인’ 쪽으로 맞춰가야 할 상황에 놓인 것.
기존 음악에 맞춰갈까 생각했지만, 결국 음악을 다시 작업하는 쪽으로 결정. 밤을 꼴딱 새며 ‘빗속의 여인’을 만들었다.
5월 19일 월요일
윤화집 일대 로케이션 촬영일. 음악 만드느라 한숨도 자지 못해 눈이 벌건 채로 촬영버스를 탔는데, 갑작스런 김도훈 선배의 대사.
“야, ‘살인의 추억’ 봤냐? 나 그동안 너무 정신 없어서 못 봤는데, 거기 ‘빗속의 여인’이 나온다며? ”
‘쿵! 맞다! 그랬었지. 살인범의 테마는 아니지만 잠깐 스쳐 지나갔었지. 아.. 그 생각을 못했네... 그럼 제목을 다시 바꿔야
하나? 밤새 작업한 음악은?’
“음.. 근데 뭐 그럼 어떠냐. 우리가 의도하는 ‘빗속의 여인’은 ‘살인의 추억’에서 사용될 때랑은 다른 의미일테니 괜찮아. 우리는
윤화가 잊지 못하는 20년의 기억, 윤화 어머니가 잊지 못하는 윤화 아버지, 기정이 잊지 못하는 아내에 초점이 맞춰졌잖아.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어때? 이것보다 딱 들어맞는 게 어딨냐?”
“고맙습니다! 아...아...니... 네! 맞습니다! 맞고 말구요! 그렇게 밀고 가지요! 선배! 아하하하!”
(앞으로 연출을 할 나는 연기도 잘하기 때문에, 내가 예고 음악 만든 게 아까워서 ‘빗속의 여인’을 제목으로 밀고 가자는 최종 결정에
펄펄 뛰며 좋아했다는 사실은 아마 선배에게 들키지 않았을 게다. 후훗 설마...)
5월 21일 수요일
촬영은 그동안 잘 진행되었다.
오늘은 파출소, 직업소개소, 동네 커피숍 등의 장면과 시내 레커 장면 등을 찍었다.
그런데 아뿔사! 기정이 윤화모와 함께 ‘빗속의 여인’을 부르는 레커 장면을 찍는데,
기정 역할의 백종학 씨가 음치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래도 명창 서권순 선생의 리드로, 의외로 꽤 재밌고 유연하게 잘
넘어갔다. 백종학 씨의 무조(無調)적 음정은 나름대로 장 3도 화성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5월 24일 토요일 새벽
어제부터 이어진 스튜디오 녹화가 13시간째 진행 중. 문제의 장면을 찍어야할 순간. 윤화와 기정이 술을
마시며 사랑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기정이 ‘빗속의 여인’을 부르기 시작하면 윤화도 같이 따라 부르며 같이 덩실덩실 춤까지
추는 장면.
술 취한 채 부르는 장면이니, 음정, 박자 엉망인 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드라마의 주제나 다름없는 노래 가사가 틀리는
건 연출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었던 일.
여기서도 문제는 백종학 씨로부터 발생. ‘노란 레인코트의 검은 눈동자’, ‘다정하게 미소지며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등 ‘검은..’이
들어가는 부분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 역시 순수하고 ‘하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검다’라는 단어를 뇌가 거부하는가보다 억지
추측.
어쨌든, 목이 쉬고, 발바닥이 시커멓게 될 때까지 노래하고 흔든 후에야 OK.
5월 26일 월요일
‘빗속의 여인’이 하늘에서 춤을 췄는지, 어제 하루 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려 촬영이 취소되었다.
오늘로 미뤄진 마지막 촬영.
한동안 회색이다가 오늘에야 오랜만에 자태를 드러낸 ‘하늘색’ 하늘. 덕분에 양수리의 멋진 풍경과 어우러지는 기정과 아내의 정겨운
한때 등 아름다운 장면을 많이 담을 수 있었다.
촬영이 미뤄졌을 때야 조금 미웠지만, 그래도 ‘빗속의 여인’이 비를 내려준 덕분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