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 특집 다큐멘터리 > 천황의나라 일본 > 제작노트
 하치(ハチ)와 옥쇄(玉碎)  
조회:
by 김환균,2005-08-01

하치(ハチ)와 옥쇄(玉碎)

 

충견 하치공(公)

오늘 아침 한 TV 프로그램에서 일본의 충견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그 개의 이름은 ‘하치(ハチ)’이다. 영화와 책으로도 소개된 하치의 이야기는 사뭇 감동적이다. 그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1923년 일본 북부 아키다(秋田)현에서 태어난 순종 아키다견 한 마리가 도쿄제국대학(도쿄대학의 전신) 농학부 교수 우에노(上野) 박사에게 보내졌다. 옛 제자가 보낸 것이었다. 우에노 박사는 굳게 땅을 디디고 선 강아지의 다리 모양이 여덟 팔(八)자를 닮았다고 일본어로 ‘8’을 의미하는 하치(ハチ)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하치는 노교수의 사랑과 보살핌을 무럭무럭 자랐다. 하치는 명견다웠다. 시부야(澁谷)에 살고 있던 우에노 교수가 열차를 타고 출근할 때 시부야역까지 배웅하고 또 퇴근할 무렵엔 역에 마중나가 주인을 기다렸다.

하치가 두 살이 채 되기 전인 1925년, 우에노 교수는 학교에서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하치는 친척 손에 넘겨졌으나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저녁 무렵이면 시부야 역에 나가 돌아올 리 없는 주인을 기다렸다. 어떤 때는 며칠씩 꼼짝 않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 1935년 3월 8일 하치는 눈 내리는 시부야 역에서 주인이 간 곳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하치가 죽기 전,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그리운 노견, 지금은 죽은, 주인을 기다린 지 7년」이라는 제목의 연재기사로 소개하면서 일본 열도에 알려졌다. 일본 열도의 감동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아직 하치가 죽기 전인 쇼와(昭和) 9년인 1934년, 저명한 조각가 안도 테루(安藤照)가 하치의 모습을 조각해 시부야 역 광장에 세웠다. 그리고 동상의 좌대에는 ‘츄우켄하치코오’(忠犬ハチ公), 즉 ‘충견 하치 공’이라고 새겨졌다. 한 마리 개가 ‘공’이 된 것이다.

 사진1 안도 테루와 하치(왼쪽), 하치의 동상(오른쪽)

 

구슬처럼 부서지라

사실 인간과 개 사이의 감동적인 이야기야 일본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플란더스의 개’, 전라북도 임실군의 오수의견(獒樹義犬)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 기념관에는 루스벨트와 함께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루스벨트가 항상 데리고 다녔다는 개다. 그런 개의 동상을 세운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동서양간에는 개를 대하는 문화적 차이가 있는 듯하다. 서양의 경우, 개의 이야기는 인간과 개의 교감과 우정 어린 관계를 드러내며, 교감과 우정 자체에서 나오는 감동을 중시한다. 반면 동양의 개 이야기는 윤리적인 교훈을 겨냥한다. 예를 들어, 오수의 개를 두고 지었다는 시는 공공연히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은 개만도 못 하다고 꾸짖는다.


人恥時爲畜  公然負大恩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

일본인들이 하치에게서 윤리적인 교훈을 발견하는 것도 이런 동양적 문화와 통하는 면이 있다.

하치의 이야기에서 독특한 일본 문화의 특질을 발견해 낸 것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이다. 인류학자인 그녀는 그녀의 명저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일본의 소학교 2학년용 수신(修身) 교과서에 실린 하치의 이야기를 주목한다. 그 이야기는 ‘은혜를 잊지 말자(恩を忘れるな)’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하치는 예쁜 개입니다. 태어나자 곧 낯선 사람 손에 넘어가 그 집의 아이들처럼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허약했던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이 매일 아침 직장에 나갈 때에는 전차 정거장까지 배웅을 갔으며, 저녁에 돌아올 때에도 다시 정거장으로 주인을 마중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주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치는 그것을 모르는지 날마다 주인을 찾았습니다. 늘 정거장에 가서는 전차가 도착할 때마다 나오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주인이 있나 하고 찾았습니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갔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을 때에도 여전히 자기 주인을 찾고 있는 늙은 하치의 모습을 날마다 정거장 앞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진2 하치의 이야기가 실린 소학교 수학 교과서

베네딕트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의 ‘온’(恩)은 영어의 ‘오블리게이션’(obligation : 의무)과 ‘로열티’(loyalty : 충성), ‘카인드니스’(kindness : 친절), ‘러브’(love : 사랑) 등을 모두 포함하면서, 그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동양의 어법과도 다르다. 일본에서 ‘온’은 사람으로서 갖는 최대한의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천황의 온’(皇恩)은 무한한 헌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채무이며, 무한한 감사로써 받아들여야만 한다.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를 통해 일본인들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그 최고 윗사람은 시대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將軍)으로 변해 왔으며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천황이 되었다. 근대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감정을 천황에게 집중하도록 해왔다. 전쟁 중 전선의 군인들에게 천황의 이름으로 나누어 준 한 개비의 담배는 병사들 하나하나에게 천황에 대한 ‘온’을 강조하였으며, 출격에 앞서 병사들에게 분배된 한 모금의 ‘사케’(酒)는 다시금 각 병사들의 가슴 속에 황은을 깊게 아로새겼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는 누구나 황은에 보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이 일본적 윤리를 표현한 것이라면 그것을 심미적 차원으로 표현한 것이 ‘옥쇄(玉碎)’라는 말이다. ‘구슬이 아름답게 부서지듯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다.’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한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다. 어떤 섬을 방위하기 위해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옥쇄하는 것, 그것은 천황의 ‘온’에 온전히 보답하는 것이다.


항복하는 것은 최대의 치욕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상이나 질병으로 적군과 싸우다 죽지 못하는 것도 치욕이었다. 일본 군대 편제에는 의무대가 없었다. 환자들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 쓰레기였다. 그래서 퇴각할 때는 환자를 다른 사람이 사살하거나 환자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베네딕트 여사의 견해에 따르자면, 하치의 이야기는 일본적 윤리관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군국주의 일본 사회에서 바로 ‘온’의 확산과 ‘옥쇄’의 내면화를 위해 채택된 것이었다.

 

하치의 부활

시부야에 세워졌던 하치의 동상도 시련을 겪은 적이 있다. 쇼와 19년인 1944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일본이 모자라는 철을 보충하기 위해 ‘금속회수운동’을 벌이면서 철거되어 용광로에 녹여졌다. 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고 하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는 듯 했다. 쇼와 23년인 1948년 안도 테루의 아들 안도 타케시(安藤士)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1948년은 맥아더사령부의 강력한 군정이 느슨해지던 시기였다. 동유럽의 공산화에 위기를 느낀 미국이 일본마저 공산화된다면 태평양이 위험해진다는 판단 하에 일본 옥죄기에서 일본 보호하기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그 해에 시부야 역 광장에는 다시 하치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번에는 안도 테루의 아들 안도 타케시(安藤士)에 의해서였다. 1946년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천황은 신의 지위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천황의 온’이라는 것이 살아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미 군정의 통치와 그 이후의 필연적인 서구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천황의 온’은 희미해지기는 했을망정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천황주의자들 또한 시대를 거슬러 이를 되살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하치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오른쪽 사진). 육군 하사였던 그는 패전 후 28년 동안 괌의 정글에서 혼자 살다 괌 주민에게 발견되어 일본에 생환한 것이다. 1972년 2월의 일이었다. 일본 땅에 발을 디딘 후 그의 첫 마디 말은 “부끄럽지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였다. ‘천황의 온’에 옥쇄로써 보답하지 못한 죄책감과 치욕감을 그는 그 한 마디에 다 담았다.

사진3 육군 하사였던 요코이 쇼이치

2년 후에는 필리핀의 루방(Lubang) 섬 정글에서 오노다 히로(小野田寬, 아래 사진) 중위가 발견되었다. 그를 위해 일본의 수색대가 파견되었으나 오노다는 전투 의지를 꺾으려는 적의 술책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이해했으나 이번에는 임무를 끝내라는 상관의 명령이 없는 한 자신의 임무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는 수 없이 옛 지휘관이었던 다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가 필리핀으로 가 오노다에게 “임무가 끝내라”고 명령해야 했다.

한 신문사에서 두 사람의 회담을 주선하려 했지만 오노다는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무기를 녹슬게 한 병사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오노다의 칼은 반짝반짝 빛날 만큼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요코이의 소총은 녹슬어 있었던 것이다.

2004년, 다시 한 번 하치가 일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월 26일자 아사히신문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안도 테루의 하치 조각상이 장남 안도 타케시(安藤士)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  하치의 동상이 세워진 지 7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고 보도했다. 손 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 당시 안도는 이번에 나온 조각과 같은 조각을 몇 개 더 만들어 하나는 황실에, 다른 2개는 가고시마(鹿兒島)현과 하치가 태어난 아키다(秋田縣)현 오다테(大館)에 사는 친구에게 선물했고, 나머지 1개는 가고시마시 시립박물관에 기증했지만 전쟁 중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사진4 오노다 히로 중위

아사히신문은, 공개된 조각은 타케시가 전장에서 돌아온 뒤 폭격으로 불탄 집을 정리하면서 나온 것인데, 폭격 당시 강한 열로 인해 부분적으로 녹기는 했지만 하치의 주인에 대한 충성과 충직한 얼굴이 잘 묘사돼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고 전했다.

시부야의 하치 동상에 대해 기록한 한 외국인은 동상 앞에서 만난 노인에 대해 적었다. 노인은 서툰 영어로 자기가 하치를 잘 알며, 하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곤 했었다고 말했다. 노인은 하치 동상을 어루만지다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갔다.

그 노인은, 아니 하치 동상을 약속 장소로 정하는 수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하치의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 일본의 군국주의, 그리고 아시아인들과 일본 젊은이들의 희생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사진5 시부야 역의 '충견 하치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