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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의 살아있는 공간 가리봉동

가리봉동은 70,80년대 10대, 20대 공장 근로자들의 꿈과 희망이, 2000년대에는 ‘코리안 드 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아왔던 재중교포들의 숱한 애환이 서린 곳이다.
과거 구로공단 자리 사이에 자리 잡은 가리봉동은 1964년 수출무역단지, 구로공단이 생기 면서 함께 형성됐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모여 든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 공단 근처에 짐을 풀면서 자연스럽게 가리봉동의 주인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 부모님의 생활 비를 보태기 위해 12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이들은, 가리봉동 단칸방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그 후, 90년대 구로공단 내 업체들이 이전하면서 가리봉동의 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근로자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재중교포들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급격 히 늘기 시작한 재중교포들은 방값이 저렴한 가리봉동 단칸방, 이른바 ‘쪽방’에 몰려들기 시 작했다.
2011년 현재,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재중교포의 수는 7,563명으로 전체 인구의 30퍼센트가 넘는 숫자를 차지할 만큼 그들의 비중이 크다. 30년 전 젊은 근로자들로 넘쳐나던 거리는 재중교포와 중국어 간판들로 넘친다. 이들은 과거의 우리처럼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방에서 타국에서의 화려한 성공을 꿈꾸며 치열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30년 전 시간이 그대로 멈춘 집들
현존하는 최대의 ‘쪽방’촌
 
가리봉동에는 70,80년대 구로공단 당시 지어진 독특한 형태의 쪽방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평범한 단독주택처럼 보이는 주택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방들이 복도 양쪽으로 빼곡히 늘어서 마주보고 있다. 보통 한 집에 20~30개, 많게는 50개까지 갖 추고 있다. 방은 두 평도 채 안 되는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장실은 바깥에 나있 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가장 큰 매력은 방값. 월세 15~20만원에 보증금이 아예 없는 집도 많다
서울에서 가장 싼 방값에, 출입문이 사방으로 뚫려있어 24시간 출입이 가능한 개방적인 독 특한 구조는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야 하는 이방인들에게 더 없이 좋은 조건 이다. 여기에 편리한 교통 조건이 재중교포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 가리봉동만의 새로운 셋방
 
가리봉동에는 새로운 형태의 월세방이 있다. 건물 한 층을 두 개의 층으로 나눈 복층구조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2층은 좁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방의 크기는 한 사람이 누 우면 꽉 찰 정도로 작지만 TV까지 갖추고 있다. 방값은 일반 월세보다 훨씬 저렴한 9~13 만 원. 보증금마저 없어 일자리를 찾아 언제든지 거처를 옮겨야하는 교포들에게는 최고 인 기다.
□ 가리봉동의 주인공, 그들은 누구인가?

남구로역에서 가리봉시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온통 중국어 간판이다. 양고기, 개고기, 꿩고 기 등 중국식 품목을 파는 식당을 포함한 각종 음식점이 즐비하고, 미용실, 노래방, 호프집 여행사, 휴대폰가게 뿐만 아니라 직업소개소, 전화방 등 다른 곳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가 게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가게는 교포들이 직접 운영하는 경우가 많으며, 무려 6개의 식당을 운영하는 교포도 있다.
가리봉동은 서울 최대의 새벽 인력시장이 서는 곳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 5시면 수백 대의 승합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모여든다. 하루 최대 2천 명이 나간다는 이곳 인력시장의 70 퍼센트가 재중교포들이다. 이들이 나가는 곳은 대부분 건설현장 용역직.
유난히 많은 비에 무더웠던 여름, 가리봉동의 여름은 더없이 치열했다. 좁은 쪽방에서도 희 망을 품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 가리봉시장 거리 입구에서 중국식 분식집을 운영하는 김종근 씨(50세), 2년 전 작은 규 모로 시작한 가게가 지금은 종업원만 모두 7명, 가리봉거리에서 가장 분주한 집이 되었다.
김씨 부부는 새벽 6시면 일어나 시장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밤 12시가 넘는 시간 가장 늦게 가게 문을 닫는다. 부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8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고향을 갈 수 없었던 불효자. 하지만 그에겐, 돈 벌면 아빠 해외여행 먼저 시켜주겠 다는 대학생 딸 윤옥(25세)이 있다.
“세계적인 여행... 돈 있으면 아빠부터 먼저 보내줘야죠. 전 아직 어리니까.”-딸,윤옥 씨
“진짜? 야 감동 된다. 요말은 내 딱 기억할거야.”-김종근 씨
▶ 김씨의 분식집 바로 앞, 노점 과일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김태순 씨(67세). 그는 가리봉동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이다. 그 역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한 다. 충남 조치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아내와는 한 달에 한 번밖에 얼굴을 보지 못 한다. 늘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던 그에게서 어느 날 , 웃음이 사라졌다. 지독한 치통 때문인데. 김 씨는 병원에도 안가고 버티며, 소주 한 병으로 긴 밤의 고통을 달랜다. 그 며칠 후, 들뜬 얼굴로 우체국을 찾는데...
“돈 버는 거? 자식들 있는 데 돈 보태주지. 우리 다른 거 없어요.
우리 돈 버는 거 다 자식들한테 보내는 돈이에요. ”-김태순 씨
▶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신학도의 꿈을 키우는 이국철 씨(37세). 아버지와는 같은 가리봉동 에 살면서 만나지도 않고, 어쩌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피하고 만다. 한국 생활 4년에 전혀 돈조차 모으지 못해 아버지 앞에 나설 용기가 없다. 그러던 그가 새 사람이 되었다. 눈물을 쏟으며 부모님께 꼭 효도하겠다는 국철 씨.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말 신학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가지고 부모님께 효도도 하면서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한국에 와서 산다는 게
정말 가시밭길을 헤치는 격이란 말이에요.”
- 이국철 씨
▶ 2년 전 임선죽 씨(29세)는 어머니(고정희 씨, 52세)를 만나러 한국에 왔다. 헤어진 지 무려 10년 만의 일이었다. 딸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10년 전 한국에 왔던 어머니. 2천만 원 빚까지 얻어 왔지만, 남편은 입국 다섯 달 만에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추 방됐다. 설상가상 11개월 치 임금마저 떼이면서 온갖 고생 끝에 4년 만에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년 만에 처음 만난 모녀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데...
“10년 만에 엄마를 처음 봤는데 너무 야위신 거예요.” - 딸 임선죽 씨
▶ 3년 만에 무려 1억을 모았다는 억척부부 강동춘(65세), 한옥려 씨(65세). 열심히 번 돈 으로 막내아들을 영국 유학까지 시켰지만, 정작 아버지는 16년 동안 아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일만 했다는 부부는 3년 만에 무려 1억 원을 모아 지난 8월 7일 중국으 로 돌아갔다. 부부의 꿈은 유럽여행과 아들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돈 벌기 위해 고생한 거니 어쩔 수 없지요. 돈을 누가 그저 줄 수 없잖아요.
내 노력이 있어야 돈 버는 거지. 이거는 아무런 요령도 없어요.” - 강동춘 씨
□ 아낌없이 품는 가리봉동
자녀 교육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리봉동을 찾은 재중교포들. 그들의 목적과 동기는 우리의 과거와 많이 닮아 있었다. 국적도 다르고, 조건도 달랐지만 함께 꾸는 꿈이 있었다. 30 년 전 우리가 머물렀던, 같은 집과 같은 방을 쓰면서, 우리가 걸었던 같은 거리를 걸으면서 꾸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가족'이었다. 현재 가리봉동은 균형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어 재개 발이 예정되어 있다. 공사가 시작되면 모두가 새로운 현실을 향해 떠나야만 한다.
가리봉동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품어왔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사라질 날까지 가리봉동은 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넓고 큰 품으로 안을 것이다.
MBC스페셜 ‘가리봉동의 꿈’에서는 가리봉동에 사는 재중교포들의 치열한 일상을 통해 성공 과 꿈,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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