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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바람에
안장 얹기
그 남자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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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의 정지된 화면 위엔, 차들이 음악처럼 유영하듯 흘러간다. 내 방에도 음악이 흐른다.
흐린 날 듣는 음악은 모두다 독약 같다. 마취 성분이 듬뿍 들어있는 최음제.
그녀는 오늘 아침, 새벽 동이 트는 그 시간 문 앞을 떠났다. 방에 누워있어도 그녀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알 수 있다. 또각또각, 내
쇠골을 따라,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의 구두 소리. 그 소리는
이미 다 끝난 노래처럼, 듣고 싶지 않아도 다시 되돌아가는 노래처럼 내 쇠골에 문신을 새겨놓았다.
오카상, 당신은
왜 지금 내 곁에 없는가. 아니, 언제나 없었지. 내 나이 일곱 살 이후 내겐 부모가 없다. 한 사람은 하늘에, 또 한 사람은 바다 건너 오카상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나를 잊은 지 오래다.
지금쯤 새벽 첫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보았겠지. 거기에 묻어나는
나의 사랑까지... 그래 아주 멀리가라, 내가 느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가라.
사랑의 시작이 벅차오름이라면, 사랑의 끝은 무너짐이겠지.
단 하루의 사랑도 사랑은 사랑이다.
“니 방을 보면 오늘만 살 사람 같아. 니 방엔 내일이 안보여.”
그래. 내
삶에 언제, 내일이 있었는가. 할아버지와 함께 컸던 나. 내 키가 커갈 수록 할아버지의 주름은 늘었고, 기침의 수가 늘뿐이었다. 누군가 내게 삶이 살만하다고 말한 적 있는가. 금가루를 뿌린 듯
온 세상이 반짝일 수 있다는 걸 누가 내게 알려준 적이 있는가.
“니 목소린 흐린 날 정말 잘 어울려”
너에게 전화를 하고 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었으니까. 내 목소리가 너에게 전해지기 전에, 너의 목소리가 먼저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니까.
세상엔 가끔,
전혀 예측하지 못할 일이 생길 때가 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이성적으로 자신을 잘 추스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은 운명이
처 놓은 그물에 걸리게 되는 때가 있다. 그날, 그 시간, 그곳에 그녀가 없었다면, 내가 오카상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까. 뭘 하든지 버벅거리고, 느리기만 한 나. 그 날은 어떻게 널 볼 수 있었을까.
그건 너의 웃음이었다. 맑은 창공으로 튀어 오른 한 마리 새처럼, 낭랑한 웃음소리. 사람으로 와글대는 술집에서도 너의 웃음소리는 내 귀를 끌었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주변이 빛이 난다고 했던가. 넌 정말 귀여운 새처럼 주변 사람들과 재잘댔지. 그런데 단 하나, 너의 눈은, 너의
웃음처럼 주변을 떠돌지 않았어. 순간순간 정지 버튼을 누르는 듯한 눈빛. 세상의 어수선함을 한방에 잠재울 듯한 고요함, 단 2초간의 고요함이 나의 가슴에 멍을 들였어.
사랑에 빠지는 것도 여러 가지지. 그 여럿 중 이건 변수에 속할 거야. 정식 코스를 따를 수 없는
자의 변칙 코스.
할아버지...에게서
풍기던 쿰쿰한 냄새, 할머니의 들깨가루를 듬뿍 넣은 구수한 우거지국 냄새, 이것이 바로 내 어린 날의 냄새다. 쪽마루를 지나 흙바람이 부는
마당엔 라일락이며 감나무, 대추나무, 벚나무, 자목련을 휘돌아 수국과 진달래가 울타리가 되었던 집. 내게 계절을
알려주는 건 바로 그 나무들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숯검댕이가 되도록 뛰어놀다가도 노을이 질 때면 쪽마루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분명, 엄마는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어둑어둑 세상이 온통 밤의 마술에 걸릴 때까지 땅바닥에 글자를 썼다. ㄱㄴㄷㄹ...쓰다가 개미 두 마리 엉켜있는 걸 보면 괜히 심통이
나 나뭇가지로 둘 사이를 떼어놓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마지막엔 언제나 엄마로 끝났다. 간절한 바람을 기도에 담듯이, 엄마를 천 번쯤 부르면 올 것 같아
자면서도 중얼거렸다. 이런 날 보고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하셨다. 자꾸 그러면 귀신이 자기 부르는 줄 안다고...그런 것은 마음속으로
하는 거라고...
내 손엔 지금 비행기 티켓이 있다. 오후 14시 오오사카행. 23년을 기다렸는데 오카상은
이제야 내게 연락을 했다. “한 번만... 꼭... 한 번만이라도 널 보고 싶구나...” 숨을 헐떡이는 간간이, 몇 개의 단어들이 내 귀를 서성댔다. 그것이 제자리를 잡아 하나의
문장이 될 때까지는 한 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카상...엄마가...
그 여자의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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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작가 오늘 뭔 일 있어? 아님....(--;) 이거 왜 이리 칙칙해. 어디 듣는 사람 정신병원에 실려 갈 일 있어? 청취자들 생각 좀
해라. 니 기분 꿀꿀하다구 온 세상을 보랏빛으로 만들어야 속 시원하겠냐?”
“뭐가 어쨌다구 김피디 저래? 박작가 오늘 한 방 했구나?”
“무슨 소리야.”
“하긴, 나도
음악방송 작가면, 오늘같이 흐린 날은 분위기 팍 잡고 싶다. 김피디... 지가 오늘 멘스날인가부지. ㅋㅋ”
“디제이- 오늘의
여자이야기입니다....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 아주 먼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이 무슨 지방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덧붙이면, 그곳은
서울의 끝쯤 되는 동네였어요. 서울을 횡단해야만 갈 수 있는 동네. 택시로도 1시간 이상을 가야하는 서울 오지. 여자가 그곳을 갔던 이유는 생일
때문이었죠. 서른 해를 먹도록 생일 케이크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그를 위해 4,5인용 커다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탔습니다. 평소의
여자였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하지 않았을 터이나, 그날 그의 모습, 그러니까
인사동에서 광화문 버스 정거장에 이르는 동안, 앉을 곳이 있는 곳이라면, 그러니까 연합통신 뒤 공원에서부터 세종문화회관의 그 멋진 계단까지, 집으로
갈 생각은 않고 내내 여자에게 낀 손깍지를 풀지 않던...그의 손에서 전해오는, 따뜻함을 향한 갈증 탓일 거예요. 그날도 오늘처럼 보슬비가 내렸는데, 세종문화 회관 앞길엔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죠. 시간은 밤 9시를
넘고 있었고, 검은 판넬엔 80일간의 세계여행을 다녀온 작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 사진 속엔 인도의 블루도시며,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의 검은 히잡 사이, 머루 같은 까만 눈동자며, 파키스탄
항구도시 카라치의 형형색색의 빨래들을 거쳐, 모로코 하얀 도시의 모습이 눈에 띄었어요. 그는 그때 말했습니다. 서른 해를 넘도록 한번도 생일상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모르는 도시, 모로코 같은 도시에 가서 살고
싶다고. 너와 함께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허허로움이 느껴졌어요. 그때 느꼈죠 여자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거. 그렇다면 역시 그의 사랑
때문에 상처받을지도 모를 거라는 확신.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대신하듯 케이크를 샀던 겁니다. 평소의 규칙과는 다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죠. 위장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커피를 대신해 보리차를 마시다, 뭔가 모자라 다시 녹차를 찾지만 결국, 오래도록 길들여진 짙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마는 필연의 고리를 외면하고 싶은 듯 그녀는, 케이크로 대신한 겁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케이크를 먹지 않았어요. 아니 케이크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아파트 앞 복도를 되돌아 나왔으니까요. 그를 만나면 정말
모로코로 갈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 그녀 앞에 놓인 수많은 인연과 일들과 결별을 고하고 쉼 없이 훌훌,,, 그렇게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거죠. 그것은 그녀가 오래도록
원하던 일이기도 했답니다. 어쩌면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심장엔 그런 공간이 따로 존재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건 세계여행을 가기 위해 로또를 사는
그녀와, 단 100만원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는 그 사이의 멀고 먼 간격이었죠. 그녀가 그의 문 앞에서 돌아섰던 이유 말입니다. 그건 꿈과 현실의 그림과도 같았어요. 한 몸인 것 같으나 절대로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그와 그녀의 사이 말입니다. 이젠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죠. 어쩌면 그녀는 죽는 날까지, 다신 사랑을 못할 것 같습니다. 비극이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전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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