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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밝힌 바가 있지만, 이지랄 샘의 닉네임에 대해 다시 한번 알아보자. 이지랄
샘이 근무하는 학원에는 EGR이라는 수업이 있다. Educational Growth Revolution.
'교육의 성장 혁명'이라는 그야말로 거창한 수업이다. 그것도 컴퓨터로 하는. 여기에서
그 거창한 EGR이 장난끼 많은 아이들에 의해 이지랄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다. EGR
수업을 하는 네 개의 반 중 4반을 맡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이지랄 샘은 '지랄포'가
되었다.
이지랄 샘의 컴퓨터로 쪽지가 날아왔다.
'랄포 샘, 새해 복 많이 받고여, 새배돈 많이 뜯기지 마세염.'
수업 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쪽지나 보내는 녀석은 누구인가. 이지랄 샘은
넌지시 교실을 둘러보다가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빛이 유난히 거무죽죽한
녀석이 실실 쪼개며 귀엽게 미소 짖는다. 다름 아닌 '아잡토'라는 아이다. 성이 아씨고
이름이 잡토인 게 아니라 아이들에 의해 불리는 별명이 아잡토다. 별명에 대한 설명을
굳이 붙인다면 '아프리카 잡종 토인'이 줄어 아잡토가 되었다.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잡토라는 별명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얼굴 빛이 거무죽죽한 게 진짜 아프리카 잡종 토인 같다.
이지랄 샘과 아잡토는 참으로 인연이 많다. 이지랄 샘은 그것을 악연이라 부른다.
우리의 이지랄 샘은 술을 좋아하지만, 맥주는 엄청 싫어한다. 술 먹은 다음날 속이
쓰려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물똥을 싸야 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장이 안 좋은
모양이니 병원을 가보라고 하지만, 병원에서는 별다른 처방을 해주지 않는다. 딴에는
속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는데도 의사란 양반은 건성으로 별 이상이 없다고 쉽게
말한다.
'스트레스성인 것 같은데요, 술을 안 마시면 낫지 않을까요?'
도대체 의사란 사람이 그 정도로밖에 말을 하지 못하다니, 나도 그 정도는 말하겠다,
당신 의사 면허 어떻게 땄어, 라고 속에 있는 분노를 폭발하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소심한 우리의 이지랄 샘은 그냥 속으로 삭힌다. 다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혼자서 궁시렁거린다.
'짜쓱이 장이 안 좋으면 대장이 안 좋은지, 소장이 안 좋은지, 십이지장이 안
좋은지 말해줘야 할 게 아니야. 저러고도 진료했다고 보험공단에다가는 영수증 꼬박꼬박
청구하겠지.'
이처럼 속이 안 좋은 날에는 학원에서 수업하기가 무척 곤혹스럽다. 이놈의 학원은
환경이 열악해서 화장실이 강사용과 학생용으로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고로 아이들이
북적되는 쉬는 시간을 피해 수업시간에 볼일을 봐야 한다. 화장실 구조도 요상해서
문이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잠그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이지랄 샘은 화장실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을 몇 가지 간직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화장실 사건의 용의자 가운데는
늘 아잡토가 있었다. 한번은 볼일이 워낙 급해 막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를 내리는
순간 '딸깍'하고 스위치 누르는 소리와 함께 실내등이 꺼졌다. 사면이 다 막혀 창문
하나 없는 화장실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더듬더듬 변기를 찾아 엉덩이를
갖다 붙이는 것도 곤혹스러웠고, 무엇을 닦기 위해 휴지를 비벼 그곳에 조준하기
역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겨우 사태를 수습하고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
'딸깍' 하고 불이 들어왔고, 한 아이가 들어서며 소변기 앞에 섰다. 아잡토였다.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누가 화장실 불을 껐지? 볼일 보기 되게 힘든데.'
이지랄 샘은 아무 말 없이 화장실을 나와 교실로 총총히 사라졌다. 어쩌겠는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으니 말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물똥인지, 설사인지가 급해 막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이번에도 '딸깍'하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불 꺼지는 소리가 아니라 문 잠그는 소리였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요놈의 화장실은 요상하게도 문이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잠그게
되어 있다. 불쌍한 이지랄 샘은 이제 꼼짝없이 화장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곰곰 생각을 해보니 화장실에 들어설 때 막 화장실을 나서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놈이 바로 아잡토였다. 핸드폰이 있으니 다른 강사에게 구조요청을 하면 되지만,
하필 그때가 수업시간이라 수업이 없는 원장에게 구조요청을 해야만 했다.
'선생이 수업시간에 화장실이나 들락거리고, 그러고도 수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렇잖아도 학생이 줄어 학원 운영이 힘든데,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세요.'
아, 불쌍한 우리의 이지랄 샘, 원장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비굴해졌다.
그러나 끝내 범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심증은 가지만, 그 녀석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어쩌겠는가.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하지 않던가. 마침내 복수의 그날이 왔다. 학원에서 정기적인
반 이동이 생겨 아잡토가 EGR 4반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이 녀석,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엄청 힘든 수업을 만들어 주마.ㅋㅋㅋ.'
이미 밝힌 바가 있지만, EGR 수업은 능력개발 프로그램과 학습 프로그램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능력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집중력, 변별력, 수용력, 파악력, 이해력 등을
발달시킨다. 즉 문제를 보다 빨리 이해하고 보다 빨리 풀게 하는 훈련이다. 그 다음
인터넷 상에 올려진 국어, 영어, 수학 등 학교 교과 과정의 문제들을 제한된 시간내에
풀도록 하여 테스트를 실시한다.
수업이 시작되고 능력개발 프로그램이 끝난 후 나머지 테스트 시간이 되자 아잡토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샘, '가치'가 뭐야요? '존재'가 뭐야요?'
'어, 이 녀석 봐라. 사람을 슬슬 가지고 노네. 엉뚱한 질문이나 하고, 또 지샘은
뭐야''
'어이, 싸가지 이리 나와.'
아잡토는 눈을 멀뚱멀뚱 깜빡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지랄 샘에게
불려나갔다.
'건방진 놈, 선생님한테 지샘이 뭐야?'
'아이들이 지랄포 선생님이라고 해서, 성이 지씨라서 지샘이라고 했는데요.'
아잡토는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순간 아이들이 재밌다고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이지랄 샘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간 내기가 아니구나.
사람을 완전히 병신 만드네.' 창피하고 화가 나 얼굴이 새빨개진 이지랄 샘은 매를
들어 아잡토의 손바닥을 있는 힘을 다해 때리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잡토가 서럽다고 소리내어 펑펑 우는 게 아닌가.
교실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이지랄 샘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 그 아이는 외국에서 살다가 온지 얼마 안돼 어휘력이 초딩보다 못해요.
아마 지랄포라는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를 거예요.'
아뿔싸,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지랄 샘은 무슨 큰 죄 지은
사람처럼 부끄러워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고 또 달래야만 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알고 그랬겠니. 몰라서 그랬지. 앞으로는 너만큼은 어떤 질문이든 설명을 다해
줄게. 우선 '가치'란 말이지. 음, 뭐라고 설명할까. 그래 중요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존재'란 말이지. 실제하는 것, 다시 말해 살아있다는 뜻이야. 흔히 너 같이 착한
아이를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이후 이지랄 샘은 아잡토가 들어오는 수업시간이면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일일이
답하느라 땀을 질질 흘러야 했다. 이건 완전히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살다왔다는 아잡토. 그래서 얼굴빛이 그렇게 거무죽죽한 것일까.
화장실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아잡토는 정말 지랄포가 뭔지, 가치가 뭔지, 존재가
뭔지 몰랐을까. 생각할수록 이지랄 샘은 꼭 속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말이다.
내일부터 우리 고유의 명절, 설날 연휴가 시작된다. 이지랄 샘은 아잡토의 컴퓨터로
답신 쪽지를 날려보냈다.
'잡토야, 너도 새해 복 많이 받고, 너는 새배돈 많이 뜯어 부자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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