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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5일 목요일 방송 원고 및 수록곡

 

음악에세이 - 노래가 있는 풍경


제  371 화 - 서른살의 크리스마스


(M) 주제음 Last Christmas / 신승훈


* 크리스마스 특집 음악에세이는 청취자  김영경  님의 실제 사연을

각색한 것입니다.


여     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은

        자동차를 판매하는 회사였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었던 난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였고

        여기저기서 야단도 많이 맞았다.


(E) 라디오에서 나오는 캐롤


여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날

        난 팀장으로부터 된통 혼이 나고

        내 자리에 앉아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E) 책상 노크하는 소리


남     윤은서씨. 

여     (얼른 눈물 닦는 듯한) 네


여     올해 우리 지점 뿐 아니라 강남구 전체에서

        자동차 판매량 1위로 판매왕의 자리에 오른

        남자다. 좀 뺀지르르하게 잘생긴 얼굴에

        느물거리면서 얼마나 변죽이 좋던지...

        특히 여자 고객들이 이 남자에게 걸려들면

        백프로.. 차를 사지 않고는 못배긴다.

        그만큼 수완도 좋고. 능력도 좋다.


(E) 종이 받아드는


여     여기 있는 것만 전송해 드리면 돼요?

남     내가 써놓은 문구대루요. 절대로 전체 문자라는 느낌 나지 않게.

        한명한명 다 이름 써서 보내야 돼요.

여     다른 분들은 그냥 전체 문자로 보내시는데.

남     에이 안돼요. 한명 한명 다 다르게 보내야 돼요.

여     ..... 알겠어요. 거기 두고 가세요.


(E)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


남     오타 나면 안돼요.

여     .... 알았다구요. (혼자 읽는 듯) 이선아 고객님. 추운 겨울철 차량

        운행은 잘하고 계시는지요. 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시던

        예쁜 미소도 여전하시구요....? (읽다가) 뭐야.... 진짜 완전 선수잖        아..?

(M)    Womanizer / Britney Spears


(E) 자판 두드리는 소리 계속 나고

(E) 걸어오는


남     다 됐어요?

여     아뇨, 아직요.

남     아직도 안됐어요?

여     육백개도 넘는데. 이걸 다 하나하나 보내라 그러니까 그렇죠.

        이런 일은 직접 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남     퇴근시간도 넘었는데. 미안해서 어떡하나.

여     미안한 줄 아시면 직접 하시지..

남     저녁 먹어야죠.

여     .... 끝내고 집에 가서 먹으면 돼요.

남     그럼 너무 늦잖아요. 그러지 말고. 나도 거의 끝나가니까

        같이 나가서 먹어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여     괜찮아요.

남     미안해서 그래요 내가. 이런 일 시킨 것도 그렇고.

        또 윤은서씨 들어오고 나서 바쁘다고 밥 한번 같이 못먹었잖아요.

여     .....뭐 그렇기는 하지만.

남     뭐 좋아해요?

여     초밥.. 좋아하기는 하는데. 괜찮은데...

(M) 사랑은 맛있다 / 휘성


(E) 회전초밥 돌아가는 소리


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소리에요.

남     뭐가요?

여     이 소리. 회전초밥.. 돌아가는 소리.


(E) 접시 하나 집는 듯


남     싱싱한 농어 왔습니다. 먹어요.

여     빨간색 접시가 제일 비싼 거 같은데. 이거 이케 막먹어도 돼요?

남     나 이번에 판매왕 돼서 상금 얼마 받는 지 알아요?

여     잘 먹을께요.

남     그런데 우리 은서씨 나이가... 내년이면 몇 살이죠?

여     내년이면 스물.. 셋.. 돼요.

남     야... 진짜 어리네.

여     어리긴요. 제 친구 중엔 벌써 시집간 애들도 있는데.

남     그래요? 벌써?

여     취직하기도 힘들고. 취직해서 일하기는 더 힘드니까요.

남     은서씨도 힘들어요?

여     안 힘들어 보이세요? 죽을 맛이에요. 남자친구라도 있으면

        확 꼬드겨서 결혼해 집에 들어앉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남     남자친구 없어요?

여     ...네.

남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때는 뭐해요?

여     그냥 뭐... 친구들 만나요.

남     솔로 친구들?

여     아무래도... 그렇겠죠?

남     그러지 말고, 나랑 놀래요?

여     ..... 김대리님. 여자친구 많으시잖아요.

남     나 여자친구 없어요. 억울하네.

여     왜요. 다들 그러던데. 여자친구 무지 많으시다고.

남     여자친구는 한명만 있어야지. 많다는건 없다는 거나 똑같은 얘기에요.

        풍요 속의 빈곤. 몰라요?

(M) 풍요 속의 빈곤 / 김부용


여     .... 솔직히 꿈이냐 생시냐 싶었다.

        여러 가지 조건도 좋고. 멋진 이 남자. 우리 지점 여직원들도

        모두 호감을 갖고 있는 이 남자가. 나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순간. 남들이 이 남자를 두고. 바람둥이라는 둥. 여자 갈아치우길

        밥먹듯이 한다는 둥. 했던 얘기들은 모두 잊혀졌다.

        지금까지 그래왔더라도, 나를 향한 이 감정만은 진심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12월 24일이 왔다.

        평소보다 화장도 더 신경쓰고. 옷도 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왔다.

        그런데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이 사람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나한테 한 얘길 까먹었나.

        술먹고 한 얘기도 아닌데. 아니면, 농담으로 던진 말을 나 혼자

        착각한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 때쯤.


(E) 걸어오는 소리


남     은서씨.

여     (깜짝) 네??

남     나 여섯시에 끝나거든요? 야간 스키 예약해 뒀는데. 같이 타러 가요.

여     (당황) 네??


(E)주변에서 오오..... 하는 소리들


남     오늘 우리 크리스마스 이브 같이 보내기로 했잖아요.


(E)주변에서 더 크게 우와... 하고.


남     그때 그러겠다고 했죠? 그거 나랑 사귀겠다는 뜻 아니에요?

(M)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 동방신기


(E) 스키장에서 쏴악 내려오는 소리


여     엄마야!!!!

남     괜찮아요?

여     나 스키도 못타는데... 제일 상급자 코스에서 내려오면 어쩌라는 거에        요. 나보구 죽으라는 거에요.

남     이렇게까지 몸치인 줄은 몰랐지. 나랑 스키 같이 탄 여자들 중에서

        제일 못타는데요?

여     네?

남     (웃고) 잡고 일어나요. 사람들한테 방해돼요.

여     아이구.... 나 스키 못타요. 그냥 걸어가요.

남     중심 잡는 게 그렇게 힘드나? 아니 스키 이렇게 못타면 딴 데

        가자 그러지. 

여     예약해 놨다면서요.

남     예약이야 취소하면 되는거고.

여     그런데요. 왜 그러셨어요? 아까...

남     아까 뭐?

여     회사 사람들 앞에서...

남     사귀자고 한 거?

여     네....

남     사귀고 싶으니까.

여     ...진짜루요?

남     나는 거짓말은 안해요.

여     ..... 왜 저랑 사귀고 싶은데요?

남     착해 보여서. 착한 여자랑 사귀고 싶었어요.

여     .....나 별로 안 착한데..?

남     그거야 사귀면서 천천히 알아보면 되고. 팔 꽉잡아요.

(M)    스키장에서 / 터보


여     그날부터 하루하루가 어쩌면 꿈같은 나날이었다.

        위험한 남자니까 조심하라는 여직원들의 충고는 모두

        날 질투하는 소리로만 들렸고.

        같이 출근을 하고. 쉬는 시간엔 옥상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고.

        점심도 같이 먹고. 퇴근도 같이 하는 시간들은

        정말 행복했다. 

        하루에 한 개씩 다른 맛의 사탕을 먹는 아이처럼

        나는 매일이 기대되고. 즐거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남     와... 암튼 오늘 그 고객은 진짜.. 진상이었다.

여     그러게. 차란 차는 다 타보고. 거기다 계약서 바로 꾸밀 것처럼

        그 요란을 떨더니. 막판에 다시 오겠다 그러고 가 버리면 어떡해?

        옆에서 보는 나까지 화나더라.

남     원래 여자들이 변덕이 죽끓듯 하잖아.

여     여자를 그렇게 잘 알아?

남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

여     치. 그렇게 잘 아는 여자들 다 어따 두고 날 사귀신대?

남     그러게? 나도 그게 이상하거든?

여     뭐야~~       

남     근데 옆구리에 낀 거 그건 뭐야?

여     아... 이거?

(E)부시럭대며 꺼내고

여     스웨턴데. 내가 손으로 짠거야.

남     나 주게?

여     아니?

남     그럼 뭔데.

여     아버지 가져다 드리라구.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남     나 말고 우리 아버지?

여     응. 아버지가 저번에 내 손 잡고 오빠 사람 만들어 줘서 고맙다구..

        꼭 붙들고 결혼하라 그러셨잖아. 그거 고마워서.

남     ...... 결혼은 무슨...

여     ...응? 

남     아니. 너도 아직 어리고 한데. 결혼은 뭐.

여     ...난 괜찮아. 난 결혼 일찍 하고 싶어.

남     야 내려가자. 팀장이 우리 맨날 옥상으로 샌다고 싫어하더라.

여     .... 오빤 결혼하기 싫어?

남     나도 아직 서른도 안됐잖아. 지금 딱 좋은데. 왜 너저분하게 결혼을

        생각해.

여     결혼이 너저분해?

남     뭐 꼭 그렇다기 보다는. 암튼. 난 그건 아직 생각하기 싫어.

여     ...... 그치만 나는...

남     어 추워. 나 먼저 내려간다.

(E) 걸어가는 소리


여     뒤돌아 내려가는 그 사람의 등이

        차가운 얼음장처럼 보였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M)    You're so Cold  / Mariah Carey


(E) 탁탁탁 들어오는 소리


여     오전에 여직원들끼리 휴게실에서 떠드는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오래간다 했더니 이럴 줄 알았다고.

        역시 윤은서는 그 사람의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바보처럼 결혼할 줄 알고 기다리는 윤은서가 불쌍하고 가엽다고

        그녀들은 낄낄대고 있었다.

        난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가. 그 사람의 자리 앞에 섰다.

        

남     (전화 통화하는 중인 듯) 네 고객님. 차량 인도까지 1주일 정도 시간

        있으시니까요. 그전에 제가 연락 다시 드리겠습니다. 네.

        (전화 끊고) 왜.

여     잠깐 얘기 좀 해.

남     나 지금 바뻐. 이따가.

여     여자 생겼어?

남     ....뭐?


여     순간.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대한 호기심이 어린 눈빛들로.


여     거짓말 못했다 그랬지. 여자 생겼냐고.

남     ....(한참 있다가) 어. 그래. 만나는 사람 있어.

여     ....뭐?

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자.


여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시 전화를 받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지만. 나의 세상은 거기서 멈춰 버린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날이었다.

(M) 총맞은 것처럼 - 백지영


-------------------1부 끝 ---------------------------


* 잠시 후 음악에세이 노래가 있는 풍경 제 2부가 계속됩니다.


여     난 지금 서른살이다.

        그럴 듯한 무역회사에서 대리로 일하고 있고.

        솔로다.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했던 연애에서

        몹시 뜨거운 맛을 본 이후.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하고 있다.

        어떤 남자를 만나도, 저 남자 역시 내 뒷통수를 칠 거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나에게 아무리 잘해줘도, 그 뒤에 어떤 의뭉스런 속셈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끝없이. 그 남자를 미워하고 증오했다.

        7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M)   사랑이 지나가면 / 이은미

        

(E)캐롤 흘러나오는


여     올해는 불황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 시즌인데도 그런 기분이 나질 않는다.

        게다가 얼마 전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하셨기 때문에

        내 기분은 엉망이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출퇴근하는 날들이었으므로

        나의 서른,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우울했다.

        그런데.


(E)전화오고 


여     여보세요? 어 선배. 왜 또...

        나 안돼. 엄마 편찮으시다니까? 민정이 해줘. 지난번에

        남자 만나고 싶다고 난리던데. 암튼 난 안돼.

        외롭긴 뭐가 외로워. 바빠서 외로울 틈도 없어. 진짜야.

        (사이) 왜 꼭 내가 그 소개팅을 해야 하는데?

        뭘 살려줘. (사이 있다가) 딱 삼십분만 앉아 있다가 나와도 돼?

        진짜야. 나중에 너무했다는 둥 그런 소리 하지마.

        알았어 그럼.

        

(E)전화 끊고


여     제일 한심해 보였던 사람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소개팅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러게 생겼다.

(M)    크리스마스 이브 / 김현철 & 임상아


(E) 레스토랑 들어가는

(E) 전화오고


여     여보세요

남     윤은서씨?

여     네. 아.. 혹시 오늘 만나기로 한 분이세요?

남     아.. 은서씨.. 보이네요.

여     네? 제 얼굴 아세요?


여     ... 라고 말하며 두리번거리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창가 쪽에 앉은 남자는. 7년 전 그 남자였다.

        곧바로 등을 돌린 난,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E)걸어가는. 거리 소음


남     은서씨. .... 은서야.

여     네? 왜요?

남     오랜만이다.

여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주세요. 오늘 소개팅. 진규 선배한테

        그쪽이 부탁한건가요?

남     어. 세상이 좁은건지. 얘기하다 보니까 진규가 니 대학 선배더라구.

여     그래서요? 그때 나 갖고 논 걸론 부족해서. 또 생각이 나던가요?

        그래서 만나게 해달라고 그랬어요?

남     갖고 놀기는 누가...

여     나는 지구가 쪼개져서. 우리 둘만 살아남았다 그래도

        당신 만나고 싶은 생각 전혀 없거든요? 다 돼도 당신만 안되거든요?

        얼굴도 보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좀 사라져 줄래요?

남     그때..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살면서... 정말 절실하게...

        깨달..

여     됐구요. 그런 깨달음을 얻었으면. 다음에 만날 여자한테나 잘해주세        요. 지금 어디 와서 수작이에요 수작이? 나 그때 당신이 알았던

        어리바리 바보같이 순진했던 윤은서 아니에요. 당신이 만나자면

        만나고. 헤어지자면 헤어졌던. 멍청이 윤은서 아니라구요.

        나 지금 나이 서른이에요.

남     은서야. 나 니가 지금 혼자라 그래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반가웠는지

        몰라. 나한테 정말.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기회를 줄래?

        내가 그때 얼마나 어렸는지.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

        변명이라도 하게..

여     놔. 사람은 안변해.

(M)    마주치지 말자 / 장혜진


(E) 전화벨 소리


여     그 이후, 그 사람은 끈질기게 전화를 해댔지만

        난 한번도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E) 노크 소리


여     (조용한 소리) 누구세요?

(E) 들어오는


여     (놀라서 조용한 소리로) 여긴 왜.. 병원까진 왜 온거야.

남     어머니 편찮으시다면서.진규가 그러던데...

여     엄마 주무셔. 나가. 나가라구.

남     은서야.

여     아우 증말. 이리 와. 나와 얼른.


(E) 복도 화나서 걷는


여     여기까지 찾아오면 어쩌라는거야? 난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

        다한 걸로 아는데?

남     은서야. 딱 십분만. 내 얘기 들어주면 안될까? 정말 딱 십분만.

여     십초도 듣기 싫어. 가. 다시는 찾아오지 마.

남     우리 아버지 스웨터는 왜 짜준거야.

여     ...뭐?

남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너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기억하지.

여     .......그래서! 

남     너랑 헤어지고. 나 우리아버지한테 얻어맞기까지 했었다.

        속없는 놈이라구.

여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7년 전 일이야.

남     그때 나도 겨우 스물 여덟이었어. 내가 최고 잘난 줄 알았고.

        잘나가는 줄 알았고. 니가 좋으면서도. 결혼 얘기 같은 거

        너무 막연해서 좀 무섭고. 두렵고. 그랬던 나이야.

여     그래서? 이제 나이 좀 먹고 결혼해야 할 것 같으니까

        같이 놀던 애들 지겨워졌어? 결혼은 착한 여자랑 해야 할 것

        같디?

남     .....

여     그런데 어쩌나? 나 착한 여자 아니거든? 그땐 내가 바보같아서

        니가 나 착해서 좋다니까. 착한 여자 행세 한 거 뿐이야.

남     그런 거 아니고. 너를 못잊겠어. 잊을 수가 없어.

        하루도 생각 안나는 날이 없고. 세월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해. 아무도 못만나겠어. 만나도 너랑만 비교가 돼.

        내 발등을 찧고 싶게 후회 많이 했어. 정말 후회 많이 했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

여     (차갑게) 그래서. 시간 되돌릴 수 있어?

남     ........

여     나도 그땐 그랬어. 다 되돌리고 싶었어. 그런데 안되더라.

        이것도 안되는거야. 잘 가.

(M)    잘가 / 춘자


여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 사람의 출현은. 내 마음을 풀어주는 계기가 됐었다.

        첫사랑에게 버림 받았다는 상처가 컸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후회를 했다니. 어느 정도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남     어 왔어?

여     여기 왜 또 왔어. 안 나가?

남     내가 어머님한테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드리고.

        팔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얼마나 잘해드렸는데.

        너 어머니가 나 디게 좋아하셔. 그쵸 어머니.


여     엄마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난 그를 끌고 나왔다.


여     진짜 이럴래?

남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었어.

여     나 남자 만나.

남     ...뭐?

여     고마워. 오빠가 나타나서 후회한다느니 얘길 해주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 내 잘못으로 버림 받았던 게 아니었구나..하고.

        이제 남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연애도 할 수 있을 것 같구.

        그래서 부지런히 만나고 다니는거야.

남     ........크리스마스 이브엔.. 뭐할건데?

여     당연히 남자 만나지.

(M)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 Olivia Olson


(E)크리스마스 캐롤


여     호언장담한대로 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자를 만났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밥도 먹고. 와인도 마셨다.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그래. 이런 남자들 중 한명과 내년쯤엔 결혼도 해야지...

        생각했다. 

        두고 봐라. 내가 널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라고 생각했다가. 멈칫 놀랐다.

        난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 나와 데이트한 남자는

        날 병원 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또 연락하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병실 복도를 걸었다.

        바깥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병원 안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E) 걸어오는 소리

(E) 문 열고


여     그리고. 병실 문을 조용히 열었을 때.


(E) 아주 작게 또각..또각... 소리


여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는 잠들어 계셨고.

        그 사람이 잠든 엄마의 손톱과 발톱을 정성스럽게

        깎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카 녀석조차도 할머니한테 냄새가 난다며

        손이 더럽다며. 잡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엄마의 손톱 발톱을 정리해

        드린 후. 열심히 팔 다리를 주무르는 것이었다.

        엄마는 시원하신지, 잠든 중에도 평안한 표정이었다.


여     ....(조용) 뭐해.

남     아 깜짝이야. 언제 왔어. 소리도 없이.

여     뭐하냐구.

남     그냥..

여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데서. 뭐하는 거냐구.

남     밖에 추워?

여     딴 소리 말구.

남     내가 뭐 할 말이 있냐. 난 니 마음 풀릴 때까지.

        아니 풀리더라도. 계속. 너한테 잘하고 싶고. 어머니한테도

        잘하고 싶고. 그냥 그렇다.

여     거짓말.

남     ......진짜야.

여     밥은....

남     생각해 보니까 밥을 안먹었네. 나.. 밥 좀 사주면 안되냐?

여     나와.

남     ..........밥.. 사주게?

여     그래.. 나와... 밥.. 사줄게.

(M)    아마도 그건 / 박혜경


(E) 걸어나오는 소리


남     눈 안온다더니... 좀 오네?

여     응. 그러네..

남     은서야. 

여     왜.

남     고맙다.


여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어떻게 눈치챈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누그러져버린 마음.

        용서 안하기로 이 악물었지만. 이미 모두 용서해 버린

        바보같은 마음.

        병원 앞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면서

        그 사람은 자기 호주머니에 내 손을 넣어주었고.

        그렇게. 우린 한참 서 있었다.

(M)    White Christmas  / All Artists


(M) 이어지며 -


여     그리고 5개월 후. 우리는 결혼했다.

        지금 그 남자는?


남     여보. 왜 이렇게 늦었어. 나 아까 아까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     청소 다 해놨네?

남     어.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밥도 해놨어.

여     잘했어. 아 맞다. 있잖아 여보.

        나 라디오에 사연 보냈어.

남     무슨 사연?

(*점점 멀어지는 느낌*)

여     사랑 이야기 보내라 그래서. 우리 결혼하기까지 히스토리를 올렸지.

남     뭐? 그럼 완전 나 나쁜놈 되는거야?

여     당근이지.

남     안되는데... 

여     선물 준대.

남     그래? 선물이 뭔데?  


(M)주제음 - Last Christmas / Wham


  





2008-12-26(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