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정서를 순화하는 건 대통령도 못하는 일이죠"
"지난 연말 즈음 드라마에서 영덕의 해돋이 장면을 방송했어요. 새해의 새로 뜨는 해를시청자에게 보여줘 힘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청자 여러분 새해 힘내십시오 제작진 일동'이라고 자막까지 넣었습니다. 그 장면이 방송된 뒤 시청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건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럴 때면 자부심을 느낍니다."

지난 97년 연말 MBC 연기대상은 거의 <그대 그리고 나>를 위한 잔치였다. 최불 암과 박원숙이 베스트 커플 후보에 올랐는가 하면 며느리 최진실이 시아버지 최불 암을 제치고 대상을 타기도 했다. 이 외 차인표와 김지영은 각각 우수연기상과 신 인상을 수상했다.
이런 결과는 배우들 개개인의 노력도 컸지만 이들이 제각각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생동감을 부여한 연출자의 역할이 컸다. 20여년을 드라마 프로듀서로 일해온 최종수 부국장을 만나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Q: <그대 그리고 나>의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시청률 1위를 달리는 기분이 어떠 십니까?

A: 기분이 나쁘지는 않죠. 사실 PD 중에 시청률에 신경 안 쓰는 사람이 어디 있 겠어요. 처음에 이 드라마를 기획했을 때는 젊은 애들의 드라마가 각광받는 상황에 서 이런 홈드라마가 고전하지 않을까 염려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연령층의 등장 인물이 오히려 광범위한 시청층을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Q: 최종수 국장께서는 '열종수'란 별명으로 방송가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도대체 스태프나 연기자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A: 요즘은 열 내지 않는데(웃음). 처음 의도한 대로 온 가족이 시청하는 드라마를 만들었어요. 보람을 느끼지요. 열 받을 일이 없어요.

Q: <그대 그리고 나>를 보면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데 감탄하 게 됩니다.
또 여러 인물들의 사건을 중층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구성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A: 드라마가 삼각관계 하나로 끌고 가는 단순한 구성이어서는 재미가 덜하지요. 전 드라마를 연출할 때 세 사람을 끌고 가기보다 열 사람을 끌고 가는 쪽을 택합 니다. 여러 등장 인물들이 서로 만나 얽히고 갈등하는 구성을 통해 그 여러 인간의 개성과 체취, 삶의 목적이 드러나고 극이 생동감을 띠지요.
그 중에서도 단연 최불암씨의 변신이 화제였습니다. 차인표씨도 연기로 주목받 았고요. 최불암씨의 극중 배역은 거칠지만 따뜻한 부정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 인물이 잘 살아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최불암씨가 배역을 잘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배우 가 달리 창조자가 아니거든요. 물론 작가가 밑그림도 잘 그렸고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한 연출도 필요했지만 말입니다.
차인표씨는 연기의 잠재력이 무한한 배우입니다. 그런데 트렌디 드라마에서 '왕자' 역할만 요구받으면서 배우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왕자' 역할을 벗어 던지면서 차인표씨는 연기자가 됐어요.

Q: IMF란 돌발 변수 때문에 극이 처음 의도와 달리 어느 정도 변할 수밖에 없을 듯 한데요. 이를테면 시놉시스에는 수경이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면서 가정과 직장 을 양립시키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최근의 사회 상황 을 감안하면 수경이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은 설득력이 떨어지는데요.

A: 글쎄 말을 들어보니 여성들이 작가에게 압력을 많이 넣는 모양입디다. 수경이 일과 가정을 잘 병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 IMF 시대를 맞아 수경이가 여자라는 이 유만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격려성 청탁 전화가 잦다고 합니다.
원래 우리의 의도 역시 직장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씩씩한 현대 여성을 그린다는 것 이었습니다. 깔끔한 정장에 손에는 고무 장갑을 낀, 그런 이미지의 여자라고 할까요.
이 여성이 연애와 결혼, 출산, 일을 통해 성숙된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이 앞으 로 보여질 것입니다.

Q: 또 시놉시스에는 수경의 친정이 망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던데 어떻게 되나요?

A: 글쎄요, 요즘 하도 망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까지는 처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들 윤철형이 부도를 내면서 그 집안이 좀 기울었는데 이제 그 아들이 정신 차리고 백화점에 나가 장사하면서 조금씩 집안을 일으켜 세우게 됩니다.

Q: 박상원이 윤철형을 위해 백화점 매장을 주선해주는 건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 에 있을 법하지 않습니다.

A: 물론 드라마에는 현실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감이란 현실과 똑같다는 게 아닙니다. ‘드라마틱 리얼리티’란 드라마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의 맥락상 부자연스럽지 않은 정도면 됩니다.

Q: <그대 그리고 나>의 인기 요인으로 중견 연기자들이 생산하는 웃음을 꼽는 의 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국장께서는 진지한 드라마를 주로 연출해오신 것 같은데 코믹한 부분을 연출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나요?

A: 제가 원래부터 유머 감각이 있어요. 웃기길 잘 합니다. 못 믿겠어요? 전 웃음 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보다 상황 자체가 주는 웃음을 선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 즘 드라마를 보면 연기 잘하는 중견 탤런트들이 아예 코믹한 부분을 담당하는 드라 마가 많더군요.

Q: PD들이 드라마를 하면서 제일 머리를 싸매는 것이 캐스팅입니다. <그대 그리 고 나>도 MBC로서는 최선을 다한 호화 캐스팅인데 캐스팅하기 어렵지 않았습니 까?

A: 드라마 출연을 섭외하러 나섰더니 확실히 일부 스타들은 각 방송사들의 모셔 가기 경쟁에 젖어있더군요. 전 스타의 캐스팅이 어려운 건 그들 스스로가 나름대로 드라마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스타들이 '이 드라마는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하면 당연히 섭외하기가 어려운 거죠. <그대 그리고 나>에 등 장하는 배우들 역시 출연 섭외에 쉽게 응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드라 마에 출연함으로써 스타에서 연기자로 변화했고 결국 덕을 본 셈이죠.

Q: 출연을 섭외했을 때 스타들이 조역이라고 주저하지는 않았습니까?

A: 연속극은 미니시리즈나 단막극 같은 것과 달라서 주연과 조연이 확연히 구별 되지 않아요. 연속극은 배우들 전부가 다 살아야 드라마도 사는 겁니다.
모두들 드라마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됩니다.

Q: 얼마 전에는 이본씨가 불성실한 태도로 촬영에 임해 드라마 출연진에서 도중 하차한다고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A: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화가 났다고 배우를 자르면 드라마를 이끌어갈 수 없 죠. 이본씨가 연기 때문에 야단맞은 건 사실이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진행해야 죠. 내가 처음에 이본씨를 캐스팅한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이미지가 나쁘다며 반대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직접 이본씨를 만나보니 나쁘지 않아 보였어요. 무 엇보다 연기의 잠재 능력도 있어보였고, 그는 자신을 소문과 편견의 희생자라고 하 더군요.
자신은 나름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는데도 그게 파문을 몰고 오고 오해를 부른다고 하더군요. 이본씨가 이 드라마에서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역을 맡았는데 나름대 로 잘 했어요.

Q: 오랫동안 현업을 떠났다가 다시 제작 일선에 복귀했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없습니까?

A: 나이가 드니까 실패가 덜 용납되는 거죠. 젊었을 때는 한 번 실패해도 다음에 잘 하면 되지만 이제는 연륜도 있고 하니 실패는 가능한 한 없도록 해야 하는 겁니 다. 나이가 들면서 함께 일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고마움을 새삼 알겠어요. 철이 든 거죠. 내가 이제까지 숱한 드라마를 하면서 태작을 한 편도 만들지 않았어요.
실패한 작품 없이 모든 드라마가 호응을 얻었지요. 젊었을 때는 그게 다 내가 잘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스태프들의 열정과 땀이 어우러진 결과였던 겁니다.
이 드라마를 찍으면서도 스태프들의 지원과 성원이 큰 힘이 됩니다. 영하 15도의 바깥에서 일하지만 마음이 얼어붙지 않는 건 다 그 때문입니다.

Q: 연출자로서의 좌우명을 말씀해주십시오.

A: 전 항상 좋은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습니다. 좋은 드라마라면 여러가지가 있겠 지만 저는 세가지 요건을 꼽습니다..
첫째 시청자가 브라운관 안의 등장인물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극에 설렘이 있어야 해요. 드라마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궁금증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 구성의 밀도를 높여야 하겠지요.
세번째로는 드라마를 통해 인생을 관조할 수 있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어야겠지요.

Q: 말이 나온 김에 묻습니다만 최불암씨는 박원숙씨와 이경진씨 중 어느 쪽을 택 하게 됩니까?

A: 하하, 그런 걸 미리 다 가르쳐주면 우린 뭘 갖고 장사합니까.


● 프로필 ●
1946년 서울 출생
1970년 서강대 무역학과 졸업
1973년 MBC 입사
1978년 어린이 연속극 <별 하나 나 하나>로 데뷔
<제3교실> <수사반장> <여인열전-황진이> <아버지와 아들>
<추사 김정희> <첫사랑> <사랑과 야망> <제4공화국> 등
연출 현재 MBC 드라마제작국 부국장


- 1998년 2월 4일 TV저널 남정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