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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리고 나>의 핵심적인 의미를 논하려면 주인공인 박상원과 최진실에게 주 목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보는 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들은 다른 조연들로부터 나오 지만 결국 그 행태들이 이 두 사람에게 수렴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엄밀하게 말해 서 개성있는 조연들의 행태와 성격은 결국 이 두 사람으로 대변되는 현대 한국 가 정의 전형성을 묘사하기 위해 배치된 소도구들이다.먼저 박상원. 그는 어촌 어느 가정의 맏아들이다. 흔히 이런 경우 집안의 모든 역 량은 맏아들 하나에게 집중 투자된다. 그런 연유로 맏아들은 모범생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고,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기업체에 취직한다. 이제 그가 빚을 갚을 차례다. 이런 '맏아들'은 멀게는 <사랑과 야망>으로부터 가까이로는 <젊은이의 양지>나 <형제의 강>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의 기본 구도로서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의 맏아들들, 즉 남성훈이나 이종원이나 김주승이 '개천에서 용 난' 사례로서 작위적이고 극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던 반면, 박상원은 다만 평범한 화이트칼라 월 급쟁이라는 점에서 더 현실적이다. 서울의 삶에 뿌리 내린 한 명의 교두보가 확보 되면 그 가족들은 시골에서의 삶을 미련없이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온다. 이미 30년 전에 해체된 시골이라는 공간은 '자식 복 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는 곳이니까. 그 월급쟁이 맏아들은 당연히 결혼을 한다. 누구하고?
이제 최진실. 그녀는 이미 한 세대 앞서 서울에 정착한 중산층 집안에서 성장한 다. 비록 딸로 태어났지만 자기 능력에 따라 부모의 적절한 뒷받침을 받는다. 여자 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기본적인 억압이 그녀에게는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절대 조 건이기보다는 가급적 피해 가고 싶은,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극 복하고 소화해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행동은 진취적이고 사고는 합리적 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60년대의 '말띠 여자', '또순이', 80년대 '까치 며느리' 같 은 새롭게 포장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로서의 수퍼우먼으로 묘사되고 있 지는 않다. 그녀 또한 현대 한국 중산층 출신의 전형적인 여성이다. 이러한 인물들 의 현실적 전형성이 이전의 다른 드라마들과 구분되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성취이 다.
좋은 드라마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게 허락된다면, 첫째 유형은 <모래시 계>처럼 시청자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다. 둘째 유형은 <그 대 그리고 나>를 비롯한 김정수의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정서적인 밀착을 통해 동일 시를 유발하는 것이고, 세 번째 유형은 김운경의 드라마들처럼 해학적인 우화를 통 해 삶의 본모습(꼬락서니)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 그리고 나>가 몰입에 기 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문제의 분명한 자각에서 출발한 비판이나 야유 등 사회적인 발언과 같은 외면 효과보다, 차라리 회한과 반성, 현실의 인정과 포용 등과 같은 내적 성숙을 기하는 내면 효과 쪽에 무게중심이 가 있음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주술사의 심리치료와 같은 측면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 공감 하고 정서적으로 밀착하게 되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고민스런 처지를 대신해 서 말해 줌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준다는 말이다.그 공통의 처지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맏아들의 집이기 때문에 밀고 들어오는 봉 건적 사고방식의 당당함에 대해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최진실이 갖게 되는 황당 함이 그것이다. 또, 가진 재산을 모두 말아먹고 여전히 허풍스런 아버지와 온갖 야 비한 방법으로 한탕주의 삶을 추구하는 동생과 바람만 잔뜩 든 여동생, 아버지의 환멸스런 삶의 유산으로 태어난 배다른 동생의 반항기 그리고 그 모든 짐의 무게를 하소연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아내 앞에 선 존재로서 박상원이 갖게 되 는 외로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의 행태를 잘 들여다보면 그 성격의 미세한 결이 드러난다. 사 돈댁에 가서 한바탕 휘젓고 전셋돈을 주고 오는 아버지의 처신, 이본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차인표의 행동, 무례한 시댁식구들을 웬만큼 수용하는 최진실 등의 모습 은 모두 자기에게 닥친 문제에 이들이 현명하고 건강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과격하고 야비한 것은 그들의 겉모습일 뿐이다. 그에 따라 시청자들은 고통스런 현실에 공감하는 한편으로 그것이 참으로 현명하고 건강하게 마무리되어 갈 것임을 예감하게 되고 안도한다. 비록 이 드라마의 겉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피 곤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따뜻한 결말에 대한 신뢰감은 일종의 주술적인 치료 효과를 낳게 된다.
흔히 좋은 작가는 배치된 인물들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신접(神接)해서 그 개별 논리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종의 자동기술(自動記 述)은 대단히 치열한 작가 정신에서만 가능하다. 이 드라마는 방금 파악한 것처럼 인물들에 대한 미묘한 성격 부여를 통해 현실감과 시청자의 원망을 담은 가공성을 동시에 성취해 낸다. 그 원망의 방향 곧, 드라마의 방향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 다. 뿔뿔이 흩어져 반목하고 서로에게 고통을 주던 가족이 결국 마음으로 한 자리 에 모이게 되리라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그 혹독한 IMF시대 아닌가. 이 시대를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각자는 바로 내일 자신의 처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 만큼 불안감 은 더 크다. 차라리 확 잘리고 나면 이토록 불안하지는 않으련만. 이렇게 불안한 시 기에 사람들의 정서는 보수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의 보수적 정서는 분명 과거와 다르다. 여기에는 반성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 도대체 이 삶이 왜 이 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잘못됐나.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준비 해야 하는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다만 현재를 향유하는데 몰입한 <질투> 이후 <애인>에 이르는 일련의 드라마들을 거품 시대의 드라마들이라고 한다면 <그대 그 리고 나>는 반성적인 시대의 첫 번째 드라마라 부를 수 있겠다.
지금 이 드라마는 손쉬운 타협으로 가고자 하는 유혹을 강하게 받을 만한 한계선 에 직면해 있다. 가령 최진실을 다시금 슈퍼우먼의 구태로 되돌린다거나, 저마다 갈 등 요소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돌연 개과천선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최진실 의 임신은 그래서 주목된다. 현실성을 잃지 않으면서 따뜻한 위로를 주는 길과 손 쉬운 타협의 길,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갈림길이 이 지점이다.
- 1998년 1월 23일 프로듀서연합회보 제134호
PD연합회 방송비평모임 대표집필: 손병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