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주말극 <그대 그리고 나>에는 요즈음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은근한 사랑법이 눈길을 끈다.
극중인물 노처녀 '교수님' 홍 여사(박원숙 분)와 홀애비 막일꾼 재천(최불암 분)의 사랑방식을 들여다보면 빛바랜 옛날식 연애편지 사연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요즘 식으로 터놓고 좋아하지 않고, 숨어서 은밀히 밀고당기는 뜸들이기 사랑방식은 보는 이들의 애를 타게 한다.

홍 여사의 독백과 재천의 비유적 대사, 그리고 조금은 꾸민 듯한 이들의 표정연기가 극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40대 후반의 지적 허영심이 많은 노처녀 홍 여사. 고교만 졸업한 그는 대학 부설기관에 얼쩡거려 대학원 수료증 2개를 따내 문화센터에서 여성학, 컨설팅학, 인간학 강사를 하면서 어줍잖은 '교수님'으로 행세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난 50대 후반의 홀애비 재천. 재천은 60년대초 머리좋은 가난한 집 아들이 몰려갔다던 수산고교를 나와 마도로스의 꿈을 키우며 원양어선을 탄다.
이 일 저 일 손대 모은 목돈 다 털어먹고 연근해 어장 선장으로, 다시 낚싯배 선장, 그러다 서울로 스며들어 수산시장 일용노동자로 전락한다.

왕년의 꿈을 먹고 사는 이 '껍데기' 인간에 대해 허점투성이 홍 여사는 누가 볼세라 전전긍긍하며 시선을 놓지 않는다.
두번이나 결혼생활에 쓴맛을 본 재천도 이런 홍 여사가 싫지는 않다. 홍 여사는 평생 노동으로 단련된 재천의 근육질 몸매와 아들에게 얹혀살면서도 '고개숙이지 않는' 당당한 남성상에 홀딱 빠진다.
한편 재천은 나이와 상관없는 미모와 수줍음으로 포장된 이런 내숭에 매력을 느낀다.
이들은 호기심으로 다가가 때론 자존심을 챙기며 물러났다 다가섰다 하는, 평행선 사랑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홍 여사의 애끊는 절절한 혼잣말과 재천이 툭 내뱉는 비유어린 대사 속에 이들의 짙은 사랑이 배어난다.

"저 우람한 팔뚝… 저 팔뚝으로 넘실거리는 파도와 싸워왔을테지. 아, 싱싱한 생명력… 아름다워라. …저 남자를 이사오라고 하는게 아니었는데…! 내 실수였어…!
마치 지남철에 이끌려드는 쇳가루처럼 나는 지금 너무나 무력하게 저 남자에게 이끌려가고 있어…! 아, 자존심 상해!"
(홍 여사 독백)

..홍 여사 등뒤에서 싸안는 듯한 자세로 같이 아령을 잡고 가르쳐주면서.. (지문)

"이게 무슨 냄샙니까? 샴푸냄새로군 요? 아주 좋군요!" (재천 대사)

40대 노처녀 교수(드라마 속에서는 그가 문화센터 교수인지 대학교수인지 명확하지 않다)가 자식 딸린 50대 홀아비에게 반한다는 설정은 보기에 따라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최불암의 입에서 뜻밖에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사랑은 눈으로 말한다" 는 예이츠의 시가 흘러나오고, 박원숙의 입에서 말끝마다 아널드 토인비의 얘기가 언급될 때 이들은 영낙없는 찰떡궁합의 모습이다.

무식을 감추기 위해, 혹은 지적 허영심을 뽐내기 위해 토인비를 들먹이는 박원숙에게 예이츠의 시는 얼마나 달콤한 함정인가.
알고보면 두사람의 수준은 딱 엇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군가 연애시절 한번쯤은 꼭 써먹은 대목 아닌가? 이 드라마의 인기요인은 이런 데서도 나온다.


- 1998년 1월 9일 한겨레신문 권정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