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소주 한두잔 정도가 주량이던 나에게 느닷없이 떨어진 술벼락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MBC 주말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촬영현장. '건달 차인표(영규역)와 하룻밤 사랑으로 임신까지 했으니 이제는 어쩐다….' 고민에 걱정까지 태산인 미숙이 견디다 못해 술 한잔 마시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술 마시는 미숙'을 연기하려고 나는 강뚝에 앉아 소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물이라 생각하고 마음놓고 마셨는데 어쩐 일인지 맛이 이상했다. '분명히 감독님은 맹물이라고 하셨는데….' 틀림없는 소주맛이었다.술 한 모금에 속이 찌릿찌릿하더니 급기야 머리까지 핑핑돈다. '아뿔싸! 소주병을 잘못 가져왔구나.'

슬그머니 최종수PD님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대로 계속'이라는 사인만 돌아왔다. 아직도 세모금이나 더 마셔야하는데 어쩌지?' 소주병을 잘못 집어온 죄가 나에게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이 소주 반병을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마셔야 했다.

촬영이 끝나고 최PD님이 나에게 말을 건넸지만 술에 취해 씩씩대던 나는 더 이상 대사를 이을 수가 없었다.

- 1997년 12월 22일 일간 스포츠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