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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에게 변신은 운명적이다. 간혹 변신없이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연기인생을 마감하는 연기자가 있지만 그것은 `가뭄에 콩나기'일 뿐 대부분의 연기자에게 변신은 필수적이다.
`천하의' 최불암도 마찬가지다.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는 아버지상인 양촌리 김회장에서 영덕 뱃사람 `캡틴박'으로 변신하기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표현은 잘 안하지만 항상 자식들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속정 깊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어느날 훌떡 벗어던지고 거칠고 투박하며 매사에 큰소리치는 아버지 `박재천'으로 변하기가 어디 그리 쉬웠겠는가.
게다가 `평생'을 김혜자와 부부로 호흡을 맞춘 그에게 다른 여자들과 로맨스를 키우는 역할,그것도 분장을 지운 채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5살이나 연하로 나오는 역할이 고민되는 것은 당연했을 듯싶다.
그런데 막상 연기를 해보니 괜히 고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니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상당히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더군요.분장이 필요없는 외모도 그렇고, 미사여구 없는 말투나 속에 쌓아두지 못하고 즉각 터뜨려 푸는 성격도 많이 닮았어요.남들은 변신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잃었던 나를 찾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러고 보니 변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일부러 주름살을 만들려고 실낱같이 눈을 뜨는 모습도 사라졌다.표정이 밝아지고 부드러워졌으며 걸음걸이도 힘차고 행동에도 거침이 없다.무엇보다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게 `허'하고 터지는 바람빠진 웃음이 사라졌다.
성공적인 변신 덕분일까.최불암은 요즘 신바람나게 연기한다.폭발적인 인기 속에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 <그대 그리고 나>가 막을 내리면 다시 김회장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는 이 드라마에서 기운잃은 한국의 남성들에게 또다른 힘을 주고 있다.
<그대 그리고 나> 드라마팀이 회식하는 자리에서 최불암의 옆에는 항상 최진실이 앉는다.멀리 있어도 “어이,진실이 이리 와”하며 옆자리에 앉힌다.
대선배가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또 나이 차이는 많지만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말하자면 최진실은 최불암의 술친구다.
드라마에서 최불암의 며느리로 나오는 최진실.최불암 관련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단골 파트너로 등장하는 그가 말하는 `최불암론'은 이렇다.
“감히 선생님 연기에 대해 제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다만 이번 드라마를 같이 하면서 느낀 것은 연기 열정이 대단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죠.녹화하기 전에 상대 연기자와 연습을 하는데 굉장히 열심이세요.인물설정에 대한 지적도 많이 해주는 편이죠.상황에 대한 분위기를 정확히 짚어낼 때마다 놀라곤 해요.
박재천이란 인물요? 상당히 매력있어요.
만약 그런 사람이 시아버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전 좋을 것 같아요. 마음만 맞으면 참 재미있게 살 것 같지 않아요? 시아버지라기보다는 속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박재천이란 인물은 무뚝 뚝하면서도 자상하고 터프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이 선생님의 실제 모습과 너무 흡사해요.
최불암 시리즈에 제가 단골로 출연한다고요? 그건 잘 몰랐네요.
왜그렇죠? 같은 최씨라서 그런가요? 깔깔”
“박재천이란 인물은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기죽는 법이 없어요.
비린내를 풍기며 서울로 올라와 건강한 남자라는 것을 유일한 자산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죠.그러면서도 꾸밈이 없고 사랑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수컷의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역입니다”그러나 이제껏 그랬듯이 그냥 매력있는 인물로만 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또다른 아버지를 창출해냈다.비록 자식을 다루는 방식은 거칠지만 가슴 한편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끓고 있는 아버지로 탈바꿈했다.가족을 위해 생명을 건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자식들의 잠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시 이들을 보게 되기를 기도하는 아버지,큰소리만 펑펑 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자식의 미래만은 꼭 책임지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는 담담히 그려냈다.
“이 드라마를 하면서 기분이 좋았어요.4대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드라마를 하기란 쉽지 않죠.그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내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하지만 뭔가 가슴 속에 뭉쳤던 게 말끔히 가신 느낌입니다”
최불암은 올해로 연기경력 31년째를 맞는다.그동안 잠깐의 외도로 정계에도 뛰어들었지만 연기만큼 정치에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국회의원보다 연기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몇배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새 록새록 피부에 와닿는다.
좋은 연기자는 좋은 국회의원만큼이나 나라에 필요하고, 좋은 국회의원은 어떨지 몰라도 좋은 연기자는 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 최불암은 `전국구 연기자'인 셈이다.
- 1998년 4월 15일 국민일보 유연옥 -